하가리의 길과 민가

하가리의 길과 민가

1. 머릿말

하가리의 길과 민가. 하가리는 제주도에서는 북서부지역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 제주시에서 서쪽방향으로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애월읍내의 자연부락이다. 하가리 마을조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2009년 제주건축가회에서 실시한 연구용역으로 인한 것이었다. 마을공간과 민가의 형태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은 누구의 영역일까? 민가와 마을공간을 대상으로 한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실측만으로는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이었다. 이는 마을공간을 조사한다는 것이 단순한 물리적 대상을 실측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을구조가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측하는 것 이상의 데이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하가리의 마을조사는 우리가 제주의 마을을 이해하는 방식에 매우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고, 민가 혹은 마을공간을 중심으로 마을주민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하였다.
필자가 연구방법으로 가장 중시한 것은 거주자와의 인터뷰를 통한 방법이다. 건축학에서는 현장연구라는 것을 건축물을 실측하고 그것을 도면화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과정으로 판단한다. 공간을 정확하게 그려내고, 도면을 통해 공간의 기능과 성격을 분석하는 것은 건축학에서 갖는 방법론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필자의 경우에는 민가건축에 대한 드로잉을 정확히 하는 방법과 훈련에 익숙하지 못하여서, 기존의 건축학에서의 연구방법에 오히려 취약하였다는 것을 먼저 스스로에게 고백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가리의 마을조사를 수락한 것은 건축공간을 이해하는 것이 물리적인 대상으로 기록하고 분석하는 것 이외에 다른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사는 것은 그 건축행위의 목적이 건물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필자가 현장에서 조사연구를 하고 싶었던 것은 단지 건축물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건축물속에서의 삶을 조사하고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삶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것은 줄자와 사진으로 하는 것 보다는 분명 그들과 대화를 통해서 얻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다행한 것은 한국학과에서의 인터뷰연습을 통한 훈련과 교육이 건축학에서의 물리적 상황을 기록하고 공간을 분석하는 방법과 병행되어 각자의 방법을 보충 하면, 더욱 효과적인 설명을 가능케 할 거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여기에서 밝힌 대부분의 내용은 거주자와의 인터뷰를 통한 정보이며, 가급적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보조적인 자료로만 활용하고 직접적인 연구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조사연구의 가장 좋은 태도는 전수조사를 하는 것이겠지만, 대개의 현실적인 사회조사는 전수조사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전수조사를 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적절한 조사대상구역과 조사대상 민가를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터뷰를 통한 조사의 방법은 그 성격 자체가 거주자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심층조사의 방법이기 때문에 전수조사하려는 시도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많은 양의 조사에 연연하기 보다는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미시적 연구의 방법과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도지정 민속자료인 오경호가옥과 문시행가옥의 경우는 조사당시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았지만, 하가리 민가의 원형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라 판단되어, 조사대상에 포함하였다. 설혹 빈집이라고 하더라도 인터뷰내용을 보완하기 위한 기초데이타를 보충하는 자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2. 길의 위계의 변화와 사회조직의 변화
|하가리내 자연부락이름과 조사대상지

마을공간을 이해하는 데 길이라는 소재는 매우 중요하다. 캐빈린치나 슐츠와 같은 이론가들이 도시공간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하는 것이 길의 형태이다. 길의 형태는 그 도시의 성격을 보여주기도 하고, 도시규모를 반영하기도 한다. 또한 도시내의 개별 가옥을 연결시킴으로써 도시민들의 어떻게 사회를 구성하고 이해하는지를 보여주게된다.
통상 올레라고 하는 것은 다 같이 사용하는 공용의 길에서 개인 주거공간의 마당으로 진입하는 과정의 사유화된 주거 진입로를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올레는 짧게는 3~4미터도 안되는 경우도 있지만, 길게 형성되면 20미터 가량의 긴 골목을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주거진입로로서의 올레는 제주만이 지니는 독특한 공간구조로 널리 소개되어져 왔다.
반면에 수개의 개인주거공간이 엮여져 있는 막다른 골목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골목길에 대해서는 덜 주목되어져 왔다. 이를 여기서는 개인적인 진입로인 올레와 구별하여 긴올레라고 명칭 하였다. 긴올레라는 말은 일상에서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긴올레는 마을의 통과도로와 연결되거나, 더 넓은 긴올레와 다시 연결되면서 나뭇가지의 형태를 가지게 되는데, 긴올레의 입구를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긴올레를 같이 사용하는 주택의 거주자들 사이에는 일상적인 이웃보다 더욱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지금 이 내용은 수개의 주택을 포도송이처럼 매달고 있는 긴올레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 안골목이난 안골이주. … 안꺼지 골목이 이시난… 무슨 장사(꾼)도 터진 길이 카부덴 막 들어옵니다… 이집은 돌아가부난 며느리(가 살고)… 여기 할망 동세니까.. (형제간) 여긴 전부 임칩, 임씨 덜, 여기도 임씨, 저기도 임씨,.. 이 골목은 거의 임씨… 여기 집을 포니까 여기 왕 사수다마는..(자신의 집만 임씨가 아니라는 말)….. (섯동네 안골에서 만난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이렇게 안쪽 골목이니까 안골이지. … 안쪽까지 골목이 있으니까. 무슨 장사(꾼)도 터진 길인줄 알고 막 들어옵니다. 이 집은 시부모들이 돌아가셔서 며느리(가 살고있고)… 여기 할머니가 동서지간이니까. 여긴 전부 임씨들이 사는 집. 여기도 임씨, 저기도 임씨, 이 골목은 거의 임씨… 여기 집을 팔게 되니까 여기에 와서 사게 되었습니다만(자신의 집만 임씨가 아니라는 말)
….. (섯동네 안골에서 만난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섯동네에서 만난 아주머니의 단순한 대답은 섯동네(서동) 안골이라 불리는 올레의 특성을 단적으로 지적하는 말이다. 제일 안쪽에 있다는 것을 통상 위계가 높은 곳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역으로 이해하자면 그 반대편인 동카름이 제일 바깥쪽의 낮은 위계를 가진 곳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안쪽이 위계가 높은 곳이라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통상적으로 볼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업적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안쪽보다는 바깥쪽 즉, 주택들이 즐비한 지역보다는 외지인들의 출입이 용이하고 장사하기에 좋은 가로에 면한 동네를 더 가치 있는 지역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지금의 시각으로 하가리의 마을 공간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마을공간의 위계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과거에 이동이 빈번했던 가로였던 동카름의 가로를 마을의 중심가로로 오해할 수도 있다. 즉, 현대도시공간에 익숙한 우리들은 전통마을의 공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미 알고 있었던 도시에 대한 상식이 방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연못 그 근방은 고씨하고 임씨가 많고예.. 알동네 잣동네는 장씨… 잣동네 문씨도 두어집 있고… 동부에 가면 강씨예… 거의 딱 굽이 져 나수다. (질문; 같은 성씨들은 다 궨당 관계 아니 마씸?) 다 가까운 친척. 거의 십촌이하… (질문; 서열이 있지 않은가 마씸?) 정확하게 있지. 제일 골목 안에 집일 수록 제일 대장. 목소리 있고 돈도 많고 예. 바깥에 제주도말로 권력이 없다든지.. 올레칩이랜 해그네, 골목입구 같은 디는 하선 같은 사람들…… ( 장00, 56세)
연못 그 근방은 고씨하고 임씨가 많고, 알동네 잣동네는 장씨… 잣동네에 문씨도 두어집 있고… 동부에 가면 강씨… 거의 딱 경계가 있었지요. (질문; 같은 성씨들은 다 궨당(친척) 관계 아닌가요?) 다 가까운 친척. 거의 십촌 이하… (질문; 골목에서도 서열이 있지 않은가요?) 정확하게 있지. 제일 골목 안에 집일 수록 제일 대장. 목소리 있고 돈도 많고. 바깥쪽에는 제주도말로 권력이 없다든지.. 올레칩이라고 해서, 골목입구 같은 디는 하선 같은 사람들…… ( 장00, 56세)
장00씨의 이야기는 섯동네는 임씨들이 모여살았고, 잣동네는 장씨들이 주로 모여살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임씨와 장씨들이 모여살았던 섯동네와 잣동네가 예전에는 마을에서 위계가 높은 공간이었음을 내비치고 있었다. 동카름의 위계를 낮게 보는 이유는 외지인의 거주가 많고, 또한 외지인의 왕래가 많은 동네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지금의 북적거리는 상가지역이 더 높은 부동산가치를 부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지만, 안정된 주거지역을 가치있게 생각했던 당시에는 당연하였을 것이다.
안정된 주거지를 더 위계있는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은 긴올레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원칙이 적용된다. 바깥쪽에 면한 가옥을 ‘올레칩’이라하여 위계가 낮은 집으로 여기고, 맨 안쪽의 집을 위계가 높은 집으로 여기는 것도 이러한 사고의 반영이다. 소위 궨당이라는 가까운 친인척 관계를 가지고 있는 올레의 구성원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맨처음의 집자리를 어디를 삼았는지를 같이 가늠지어 본다면, 마을의 중심가로에서 먼 쪽에 처음에 집자리가 설정이 되고, 그 집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포도송이처럼 이후에 동생과 아들과 조카뻘이 되는 궨당들이 집자리를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안쪽과 바깥쪽이 없는 터진 통과도로에서는 그 위계와 집자리의 순서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긴올레와 같은 막힌 구조의 공동체에서는 마을안길에서부터 점차 안쪽으로 가옥들이 붙어가는 방식으로 올레가 길어진 것이 아니라, 맨 안쪽에서부터 집자리를 잡고서는 점차 후손들이 바깥쪽으로 새로이 집들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가정을 할 수가 있다. 이는 올레의 길이가 맨 처음부터 거의 설정이 된다는 의미이며, 옆으로 가지를 쳐서 새로운 올레를 만들 수는 있지만, 더 깊은 곳으로 올레가 성장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올레내의 학렬의 위계가 명확하다는 것이 그 구성의 원칙이라고 한다면, 이는 올레의 형성과정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윤씨가 이골목에 살았고, 요기는 송씨.. 많이 서꺼져서, … 주로 알동네하고 잣동네는 장씨,. 섯동네 거기는 임씨. 하여튼 임씨, 장씨가 … 옛날 이장들 보면, 장씨 임씨가 마을을 지배해서… 여기는 여러 가지 성씨들… (30년전) 그때도 (여기는) 성씨는 섞여 있었고… 거기가 장씨가 많이 살았거던 ….(동카름에서 만난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윤씨가 이골목에 살았고, 요기는 송씨.. 많이 섞여 있었지. 주로 알동네하고 잣동네는 장씨,. 섯동네 거기는 임씨. 하여튼 임씨, 장씨가… 옛날 이장들 보면, 장씨 임씨가 마을을 지배했어… 여기는 여러 가지 성씨들… (30년전) 그때도 (여기는) 성씨가 섞여 있었고… 거기가 장씨가 많이 살았거든.
….(동카름에서 만난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마을 공간의 형성에 대해 이해하는 소재로 길은 매우 중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동카름을 관통하고 있는 마을안길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은 하가리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하가리 내에서의 길의 위계의 변화는 외지인들이 드나드는 동카름을 지나는 길이 마을내의 포장로가 생기고 버스로 통학과 이동을 하는 생활의 변화가 생기면서 새로운 포장로가 외지인과 하가리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마을안길의 역할을 하고, 동카름의 마을안길은 평범한 마을 골목길로 변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저기(왕복2차로)도 큰길인데, 저기는 군 사업으로 버스들 다니기 위해서 도로 보상을 주면서 확장을 했주게, 밭 들어간 건 보상을 안줬고, 집 들어간 건 보상을 줬고,..점빵은 여기가 점빵 해났고, 여기가 무당집인데, 요 앞에 저기 일곱 살 때 사 먹어낫주. 요 상점은 근래에 생긴거, (질문: 요거 생긴거는 십년쯤 되수과) 아이구 삼십년 돼서. 이거 접어 분 때가 삼십 칠팔년 돼서. (동카름, 60대 정도 남자)
저기(왕복2차로)도 큰길인데, 저기는 군 사업으로 버스들 다니기 위해서 도로 보상을 주면서 확장을 했지. 밭 들어간 건 보상을 안줬고, 집 들어간 건 보상을 줬고,..점포는 여기가 점포를 했었고, 여기가 무당집인데, 요 앞에서 일곱 살 때 사 먹었었지. 이 상점은 근래에 생긴 거. (질문: 그러면 이 상점이 생긴것은 십년쯤 됐나요?) 아이구, 삼십년 됐어.
….. (동카름, 60대 정도 남자)
거기가 제일 큰 길이엔 허난, 어휴 대도로지, 하가리를 꼭 거쳐야.. 자운당으로 난 길은 옛날에 만들긴 했는데, 포장은 70년대.. 77년정도에… 세멘포장한때도 버스는 다녔지… 여기 막차가 있었지… 납읍까지 연결됐다가.. 한림까지… (장00, 56세,남)
거기가 제일 큰 길이라니까. 어휴 대도로지. 하가리를 꼭 거쳐야.. 자운당으로 난 길은 옛날에 만들긴 했는데, 포장은 70년대에 했지. 77년정도에… 시멘트포장 한 때도 버스는 다녔지… 여기 막차가 있었지… 처음에 납읍까지 연결됐다가.. 나중에는 한림까지 가고… (장00, 56세,남)
현재 하가리를 관통하는 중요한 도로는 일주도로와 중산간을 잇는 도로이다. 도로의 방향은 남북으로 연결 돼있는 것처럼 보이나, 지도를 확인해보면 북동향에서 남서향으로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형태로 되어있다. 이 길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중앙선이 그려져 있는 왕복 2차선의 도로이며, 인도 블럭이 따로 깔려있는 구간은 매우 짧지만 그나마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있고 왕복차선이 구분된 유일한 내부도로이다. 도로의 외형을 보아서 포장공사를 한지 몇 년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사실 시멘트 포장을 하고 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것이 30년전의 일이며, 아스팔트 포장공사를 한 것이 23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 시설은 제주의 변두리 마을이 그러하듯이 버스가 유일하다. 마을을 관통하는 버스노선은 제주시에서 한림까지 연결되어져 있으며, 마을 정류장에서 6시 31분에 한림방향의 첫차를 탈 수 있으며, 제주시 방향의 첫차는 7시 19분에 있다. 하루 배차는 각 방향 7회이고, 배차간격은 대략 두시간 정도이다. 이는 운전이 어려운 노인과 어린 학생들로 하여금 마을 내에 고립된 생활을 하게하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마을내를 관통하는 버스와는 달리 상가리와 하가리 사이를 지나는 중산간 도로로는 제주시와 모슬포를 연결하는 버스가 20분 정도의 간격으로 지나간다고 한다.

그림  ] 과거의 외지인이 드나들던 길

그림  ] 현재의 마을중심을 지나는 버스길
따지고 보면, 마을을 관통하는 이 2차선 도로가 예전부터도 매우 중요한 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버스가 다니기 이전 외지와 연결되는 주요도로는 따로 있었는데, 이는 동카름을 지나서 주견대와 연결되는 도로였다. 지금으로 치면, 이 도로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간선도로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처럼 버스가 다니기 이전의 주 교통로는 이 길이었다. 30년 전에 버스가 다니지 않던 시절 용흥과 소길마을에서 애월중학교로 걸어서 통학하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다. 당시에는 이 길이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당시에는 마을을 관통하는 지금의 왕복2차선 도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길을 통해서 고내와 하가, 용흥, 소길이 연결되고 있었으며, 신엄 남또리 해안에 있었던 열가구 정도의 어업마을에서는 간혹 물고기를 팔기위해 주견대를 가로질러 하가리와 용흥, 장전으로 다니던 길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 버스가 다니는 마을내 중심가로인 2차선 도로는 20~30년 이전에는 외지인이 다니지 않는 단순한 마을길에 불과하며, 동카름을 가로질러 주견대로 이어지는 길이 가장 이동이 빈번하고 상업적인 중요도가 높은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위계적으로 이해 할 때 당시에는 그러한 가로가 가치있는 동네로 주목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림  ] 과거에 외지인 왕래가 빈번했던 동카름의 마을 안길

그림  ] 현재 하가리 리사무소앞을 지나는 마을 안길

가로의 위계에 대해서는 보행을 위주로 다니던 때의 생각과 버스와 자가용을 이용하는 지금의 생각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동카름의 거리가 중요한 도로라고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동카름에 성씨가 섞여있고, 중요한 인사들은 거기에 살지 않았다는 것은 왕래가 빈번한 동카름의 거리가 잣동네나 섯동에 비해서 위계가 높지 않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의 왕복2차선의 차로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위계는 동일한 중요한 도로이며, 과거에는 외지인의 왕래가 적은 마을내의 중요도로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지금은 교통이 편리한 중심가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동 통로로서의 길이 위계가 바뀐 것은 도로포장과 버스의 출현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 길에 풀빵장사를 하는 구멍가게 하나만이 외롭게 길을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인구가 많았을 때는 정미소 1군데와 잡화와 막걸리를 파는 점포 3개가 이 길에 면해서 장사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때는 마을내 중심가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를 이용한 교통로의 역할을 하는 지금은 상가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연화못을 지나서 주택도 없는 곳에 있는 2개의 식당만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가게이며, 그나마 그곳도 마을사람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지금은 위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을의 기본 구성조차도 염려되는 수준으로 커뮤니티를 수행하는 가로의 기능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가로가 확장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잣동네는 마을내에서 이동이 용이한 지역으로 변모하였으며, 섯동네 안골은 동일한 성씨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반면에 잣동네에는 다른 성씨들이 섞여져서 복합되어지고 있는 것도 가로 성격의 변화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로의 위계가 변하고 있는 것은 교통수단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하고, 시대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마을공간에서 길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보아야하는 것은 이렇듯 길의 위계의 변화가 사회조직의 변화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을내에 학교나 마트와 같은 공용시설의 위치가 지가를 변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길의 위계의 변화가 마을내의 사회조직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주는지를 직접적으로 증거 삼을 수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안거리의 유형적 이해

건축에서 유형이라는 것은 단순히 건축의 물리적 성격을 분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유형이라는 것은 그 유형을 지속시켜온 집단의 관습과 기억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어서, 한 집단의 문화적 성격을 규명할 때에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기도 농촌민가의 유형은 중정형의 주택이고, 제주도 농촌민가의 유형은 안팎거리형의 분동형주택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주거형태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연환경, 생산양식, 주거문화, 가족관계 등의 차이를 모두 포함하는 문화적 배경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자료인 것이다. 때문에 한 지역의 민가의 유형이 어떤 형식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쉽게도 제주도 민가에 관한 수차례에 걸친 조사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를 미시적관점에서 유형분류를 해 본적이 아직은 없었던 것 같다. 총체적으로 제주민가의 종류를 두칸집, 세칸집, 네칸집으로 설명은 하였지만, 구체적으로 제주도 안에서도 어느 지역에서는 어떤 형식이 주를 이루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접근이 없어왔다고 보아진다. 이는 제주도를 동일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이해하여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미시적 관점에서 보면, 제주도도 결코 작지 않은 지역이다. 이는 제주도 전체가 걸어서 일일 생활권의 범위에 들어있지 않을 뿐 아니라, 한라산으로 인한 기후의 특성이 지역적으로 다르고, 또한 정치적 입지가 지리적으로 같지 않다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조금씩 추가적인 조사 및 연구를 진행하여야 할 사안이지만, 제주인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제주민가의 미시적 접근을 시도하여야 할 것이다.
잣동네에 있는 문시행가옥은 현재 제주도지정 민속자료이다.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 가옥이 예전의 이곳의 가옥구조의 많은 부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민속자료를 잘 관리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만, 행정에 의존하기에는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이 현실이며, 그렇다고 소유주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합당한 처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이 현실이다.

민속자료 copy
❚ 하가리 872번지 문시행 가옥의 배치평면도
문시행가옥은 아직 그래도 가옥의 많은 부분이 잘 보존되어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관람자를 위한 안내문구나 별도의 책자와 정보 등이 갖추어지지 않은 말로만 민속자료인 것은 안타깝게 여겨야 할 부분이다. 조사하는 입장에서도 안거리의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폐쇄되어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문이 개방되어있는 밖거리는 훼손이 많이 이루어진 상태여서 그 모습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한다면, 문시행 가옥의 평면은 민속자료지정이 취소된 오경호 가옥과 더불어 하가리의 초집의 초기의 형태를 확인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잘 보존하는 것은 변화하는 주거문화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왜 이 두가옥의 유형이 중요한가 하는 점은 앞으로의 글을 통해서 밝혀나갈 것이다.
현재 문시행 가옥의 입구에 세워있는 제주도 초가의 소개의 글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제주도 민가의 일반적인 형태인 초가집은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가족 구성 및 생활 양식을 반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이엉은 1년에 한번씩 덧덮어 가고, 지붕마루가 없게 하는데 이런 기본 틀은 바람이 많은 제주에서 견딜 수 있는 지혜로운 건축기술이다.
초가는 그 크기에 따라 2칸집, 3칸집, 4칸집으로 구분되며 집안 울담안에 배치된 집의 수에 따라 외거리집, 두거리집, 네거리집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두거리집 이상의 집은 각 채마다 부엌이 따로 마련되어있어 부자간의 가족이 취사를 각각 따로 하고 생산, 소비, 경제를 각자 영위하며 살게 되어있는 점이 육지의 민가와 크게 다르다.

이러한 소개는 문시행가옥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 초가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안내문구로는 문시행가옥의 특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의 변별성이 부족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지금에 와서는 문시행 가옥에서는 그 가옥의 특징을 통해 해설이 되어 지고, 그를 통해 하가리의 초가를 설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해설이 요구되어진다. 이미 이 가옥은 실측되어 기록되어 있는 도면이 있는 상태이므로 이 기존에 알려져 있는 도면과 자료를 같이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겠다.

문시행가옥

❚ 도판: 제주의 건축, 제주도, 1999, 상지문화. 38p.

문시행 가옥의 안거리의 평면은 3칸형중 중마루형으로 소개된 평면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 평면의 형태는 지금 하가리의 변형된 평면의 원 모습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주고 있는데, 거주자와의 면담결과 1449번지(잣동네)집과 875-4번지(잣동네)의 집도 본래의 평면 유형도 이 가옥과 같은 형태의 것으로 추정이 되며, 알동네 1396번지의 평면 역시 이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이 되기 때문이다. 이 중마루형의 평면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현재 남아있는 구옥들 중에서 많은 집들이 정지와 작은 구들을 맞바꾸어 개조해 버림으로써, 마치 작은 구들이 앞쪽에 있는 한칸형의 세칸집 주택으로 오인하기 쉽도록 변형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유형(prototype)과 변형은 형성되는 과정은 단순한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시행 가옥의 형태가 단순히 하가리에 국한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의 북서부 일대의 가옥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며, 또한 정지와 작은 구들을 맞바꾼 행위 역시 북서부 일대의 가옥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는 추후 제주의 주거문화를 연구함에 있어서 필히 상세히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지금 안거리의 내부를 자세히 관찰 할 수 없는 것이 연구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문시행_전경

❚ 문시행 가옥의 올레입구와 가옥의 전경. 구부러진 올레는 긴올레와 마당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다.

문시행_안거리

❚ 문시행 가옥의 마당. 마당의 초입에 대지에 단차를 둔 잇돌이 보인다.

❚ 안거리 뒷면. 왼쪽이 삼방에서의 출입문이고, 오른쪽은 중마루에서의 출입문이다. 잣동네 1449번지 주택이 본래 중마루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방 오른쪽 중마루에서 출입하는 판문이 있기 때문이다.
❚ 안거리 좌측의 작은 구들의 창. 정지 뒤쪽에 있는 작은 구들은 낭간이 없이 구들의 벽이 바로 외기에 면하기 때문에, 돌을 쌓은 벽이 방의 벽이 된다. 이러한 구조는 구들이지만 창을 크게 만들기 어려운 이유가 된다.
안거리의 유형의 변화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사례가 있었지만, 잣동네의 875-4번지의 면담내용을 사례로 소개해 보겠다. 875-4번지는 90세의 장00 할머니 혼자 거주하고 있는 상태이다. 가옥은 세거리 집으로 되어있으나, 안팎거리의 살림집의 형태는 아니며, 안거리 외에는 둘 다 쇠막이나 창고 등의 비주거용 건물이다. 안거리는 뒤쪽으로 증축된 흔적이 역력하며, 이 내용에 대하여는 장00 할머니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정지가 증축된 형태에 대해서는 두 차례에 걸친 변형이 있었으며, 본래의 위치에서 현재의 위치로 위치가 옮겨지는 첫 단계의 시기에서 아궁이를 통한 취사와 난방이 결합된 시스템으로 형태가 변형되었고, 두 번째 단계에서 바닥을 메워 입식의 부엌으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을 장시간에 걸친 면담 끝에 알 수 있었다. 처음에 정지의 위치가 현재의 부엌의 반대편 전면이었다가, 그곳을 방으로 만들면서 큰구들 뒤의 고팡을 바닥을 메우지 않고 아궁이에서 난방을 하는 정지로 만들었다가, 다음단계에서 정지의 바닥을 메우고 지금의 입식부엌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처음에는 지금 부엌의 위치에 정지가 있었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방이 있는 데를 가리키며 그 곳이 정지였다고 말을 하였다.
❚ 875-4번지 배치평면도
초가집이란디, 스레트올리간디가 한 삼사십년 넘어신가. 그래서 비가새가니까 작년에 우 덮어수다게. (식구는 어떻게 되십니까?) 식구? 아이들 예, 서울 가불고, 시에 살아불고 해부난 나혼자 이수다. … 이부락에서 태어나고, 이 동네에서 결혼허고, … 오래살아수다. 우리친정은 저 알동네고,. 저 아래 내려간디.
원래는 우리 커올때는 장칩, 임칩 제일 만허댄 해나수다. 겐디 다 객지들 가불고 예, 장칩 본정도 몇 사람 어서 마씸. 서울가불고 시에 살아불고. 우리 친정이 장칩인디. 근데, 임가도 역시 그렇수다. 젊은 사람들은 서울가불고 시에 살아불고 이딘 본토백이들은 얼마 어서마씸.
(지금 부엌이 뒤에 있는데. 혹시 초가집 일 때 부엌이 앞에 있었지 않았습니까?) 부엌,.. 이디 그냥 그대로 이서나수다게. (지금 부엌이 있는 자리에 말입니까?) 예. 예. … 씽크대 걸고 보일러 걸멍 우만 머 했주. 연날 집이 난 얕음니다 게. …. 이게 뒷간 마씨.. 연날은 장팡뒤, 장담아 먹는디. 지금은 장 안담가먹으니까. .. 도가지 몇 개 논거. 거 빈그릇 논거. …
(굴묵은 어디 있었습니까?) 여기 온돌로 해서 여기서 가마 솥 걸고 때 나수다. 경 헌디 보일러 장치 해부니까. 이젠… 일로 불 때나십주게. 연기통 저디 빼고. …
(방이 원래 이렇게 두 개가 붙어있었습니까?) 원 처음에는 여기 초가집 짓어볼 때에는 여기가 부엌이라나수다. (여기 말입니까?) 예. 부엌이라났는데, 개량해서 우리가 방을 놓고. … 옌날 맨 처음에 거기가 부엌이라수다. 게난 몇 번 대다시 허멍. (그럼 부엌뒤에 작은방이 있었습니까?) 예. 예. 원래 작은방은 이서나고.
원래 초가집이었는데, 슬레이트로 바꾼것이 한 삼사십년이 넘은것 같아. 그래서 비가 새어가지고 작년에 지붕위로 저걸 덮었지요. (식구는 어떻게 되십니까?) 식구? 아이들은 서울에 가버렸고, 또 제주시에 살아버리고 해서 나 혼자 살고 있지요. 이 동네에서 태어나고, 또 이 동네에서 결혼도 하고, … 오래 살았지요. 우리 친정집은 저 알동네이고.
원래 우리가 자랄 때에는 장씨집과 임씨집이 제일 많다고들 했었어요. 이젠 다들 객지로 떠나가고, 장씨집 본가에도 몇 사람 남아있지가 않아요. 서울로 가버리고, 제주시에로 가서 살게 되고, 우리 친정은 장씨집인데, 임씨집도 마찬가지예요. 이제 본토백이들은 몇 남지를 않았어요.
(지금 부엌이 뒤에 있는데. 혹시 초가집 일 때는 부엌이 앞에 있었지 않았습니까?) 부엌, 여기 그냥 그대로 있었습니다. (지금 부엌이 있는 자리에 말입니까?) 예. 예. 씽크대를 설치하고 보일러를 설치해서 바닥만 높였지요. 예전에는 바닥이 막 낮았습니다.
(굴묵은 어디 있었습니까?) 여기 온돌로 해서 여기서 가마 솥 걸고 불을 때었습니다. 그러다가 보일러시설을 해버려서.
(방이 원래 이렇게 두 개가 붙어있었습니까?) 맨 처음에는 여기에 초가집을 지었을때에는 여기가 부엌이었습니다. (여기 말입니까?) 예. 여기가 부엌이었는데 개량해서 우리가 방을 만들고, … 옛날 맨 처음에는 거기가 부엌이었지요. 그러니까 몇 번이고 대수선을 하면서,  (그럼 부엌뒤에 작은방이 있었습니까?) 예. 예. 원래도 작은방은 있었지요.
장00 할머니가 연세가 많아서, 대화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집도 본래는 중마루형의 평면을 가진 세칸집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전에 보았던 1449번지의 경우는 정지와 작은구들의 위치만을 서로 바꾼 것에 불과해서 오해의 소지가 적었지만, 이 집의 경우는 큰구들 뒤의 고팡을 없애고 정지를 만들고 본래의 정지는 방으로 만들어 버림으로 해서 방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결과가 생겨났고 때문에 면담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본래의 구들이 어느 쪽이 었는 지 확인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면담을 통하여 추정한 본래의 평면형태는 문시행가옥의 안거리 평면과 동일하다고 여겨진다. 때문에 문시행가옥의 형태라는 것이 하가리에서 매우 비중 있는 주거건축의 유형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시집 올 때부터 지금 부엌 위치에 정지가 있었나요? )저가 시집 올 때 이디 부엌 이서수다. 근데 우리세대에서 몇 번 대다시 헌겁주. (부엌을 없애버린게 몇 년정도 된 일인가요?) 헌 오십년 넘었주. (지붕도 그때 바꾸셨나요?) 그때 초가집이어난게. 부엌을 이리 웽겨논지 후에 초가집이랏딴. 스레트는 읍에서 덮으랜 허니까. … 덮으고. (그러면 스레트를 덮은 건 언제쯤인지 기억하십니까?) 한 사십 몇 년 되신가.
원래 이디가 원래 고팡. 부엌을 허기 전에는 고팡으로 사용해실 꺼우다. … ( 그때 정지 메워 불 때 다른 집도 정지 없애고 해수과. 정지 옮기고..) 다른 집도 역시 그거 마씸. 옛날 무사. 연기 팡팡하는거. … 부엌으로 때는거 연기.. 다 방안에 기시려수게. (그때 정지들을 다 저렇게 방으로 고치기를 많이 했는가요?) 예. 예.
(처음 시집 올 때부터 지금 부엌 위치에 정지가 있었나요? ) 제가 시집 올때에 여기에 부엌이 있었지요. 그러다가 우리 세대에서 몇 번 대수선을 한거지요. (부엌을 없애버린게 몇 년 정도 된 일인가요?) 한 오십년 넘었주. (지붕도 그때 바꾸셨나요?) 그때는 초가집이었었지. 부엌을 이리로 옮겨온 후에 슬레이트로 덮게 된것은 읍에서 덮으라고 하니가 덮게 되었지.  (그러면 슬레이트를 덮은 건 언제쯤인지 기억하십니까?) 한 사십 몇 년 되었을꺼라.
원래 여기가 고팡. 부엌을 만들기 전에도 고팡으로 사용했을 껍니다. (그때 정지를 메워버릴 때 다른 집들도 정지를 없애고 그랬나요? 정지 옮기고..) 다른 집도 역시 그랬지요. 옛날에 부엌에서 때는 연기가 다 방안을 그슬려버렸지요. (그때 정지들을 다 저렇게 방으로 고치기를 많이 했는가요?) 예. 예.

장00 할머니의 구술에 의하면, 방과 정지를 바꾸거나, 정지를 고쳐 방으로 만드는 일이 한동안 많은 집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 수 있다. 보통 초가를 개량한 것이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의 영향으로 이해되지만, 장00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정지를 방으로 만든 것은 새마을 운동과 같은 변화가 있기 훨씬 이전에 있었던 주생활과 기술의 변화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 875-4번지. 진입 올레에서 본 모습

❚ 875-4번지. 우영에서 마당을 바라본 모습

❚ 875-4번지. 안거리 좌측으로 우영이 있고, 우영담이 열린 부분을 ‘우영도’라고 설명하고 있다.

❚ 875-4번지 안거리 정면의 모습.
❚ 875-4번지. 모커리 쇠막의 모습. 좌측은 어린암송아지만을 위한 쇠막이었다고 한다.
❚ 875-4번지 현재 정지의 모습. 원래 고팡이었던 자리.

4. 밖거리의 고팡에 얽힌 이야기

문시행가옥의 밖거리에서 주목해야 할 것으로 고팡 공간이 있다고 여겨진다. ‘제주의 건축’에 기록된 도판에 의하면, 문시행 가옥의 고팡은 마루가 깔려있는 공간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지금의 현장에서는 마루가 깔려있지 않은 흙바닥으로 되어있다. 이는 본래 마루가 있었는데, 헐어서 없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로 마루널이 깔려있지 않고 본래부터 흙바닥으로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이 되었다. 그렇게 판단하게 된 연유는 밖거리에 있는 고팡에서 밖으로 직접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고팡이라는 것의 주요 기능은 수장공간이라는 것인데, 밖에서 바로 출입할 수 있는 고팡은 중요한 수장공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주에서 고팡이라는 곳은 주로 쌀과 같은 곡물을 저장하는 곳으로,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여겨서 반드시 큰구들에 붙여서 만들게 된다. 또한 신앙적으로도 안칠성을 모시는 곳으로, 일반적인 창고와는 격이 다른 곳이다. 때문에 밖에서 출입할 수 있는 수장공간이라는 것은 아무리 고팡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안거리에 있는 고팡처럼 중요도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보안상 취약한 공간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도 안거리에 고팡이 따로 있기 때문에 밖거리의 고팡이라는 것은 중요치 않은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무리한 판단은 아니다. 하지만, 섯동네에서 면담하는 과정에서 밖거리의 고팡이 단순히 창고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만도 또한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팡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의미와 제주민가가 보여주는 삶에 대응하는 공간적 변화를 이해하는 모습을, 하가리 1491번지 가옥을 중심으로 서술해 보도록 하겠다.
❚ 밖거리 전경.
❚ 밖거리 가운데 상방이 허물어진 상태.

❚밖거리 괴팡의 모습
1491번지는 스레트로 지붕을 개량하기는 하였지만, 기본 뼈대는 목조의 초집의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주택이다. 1491번지는 현재 사람이 기거하지 않고 있는 폐가이며, 안거리는 폐쇄되어있었고, 밖거리는 훼손의 정도가 심하여 많은 부분이 허물어지기도 하였고, 특히 가운데 상방의 경우에는 마루판을 훔쳐 가 버려서 맨 흙바닥이 노출된 상태였다. 1999년 12월에 이 집을 방문했을 때, 이 집 마당에서 약초를 키우던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아래는 그 할머니와의 대화 내용이다.

( 할머니, 여기서도 가운데방을 마리엔 불렀습니까? 아니면 삼방이라고 불렀습니까?) 어~, 마루, 삼방, 마리이시난 마루방, 아주 옌날엔 삼방, 삼방게… 이젠 마루 어서 보일러들 세멘  해시난,.. 옌날엔 삼방, 쳇방, 구들, 구들고랑 방이엔 허주. (혹시 고랑케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예? 고랑케?… —-> 삭제

쳇방, 옌날 부엌고라 정지.. 부엌다음 호끔 조근거 쳇방,..(쳇방에도 마루를 깔지 않았습니까?) 쳇방도 마루 깔아도 쳇방이엔 험니다. 건디 곡석들 항아리 놩 허는거, 고팡. 그게 고팡이주. (여기에 뭔가 있었던것 같은데 아시겠어요?) 여기 이문간이 이섯주 . (이문간에는 소를 키우게 돼 있었나요?) 이문간이엔 사람 들어오고, 소매고..–> 삭제

(안거리는 집을 늘린것처럼 보입니다 만) 모르쿠다. 개량시킬때도 늘리지 않아수다. 개난양 옛날집으로 마루같은 거, 참낭양, 굴무기.. 사람 안사니까 고물장사들 다 때가부런. 관리해도 양, 여기 문채운거 문 채운양 다 떼가부런 안네 뒤주같은거 참낭 궤같은거 전부예.. 여기 박거리 마루같은 거 다 떼가부런.. 한 오년전에.. 이 문들도 다 떼가부런, 고물장수들 다 도둑게… 우리 관리 해봐도 필요어서마씨… 낮에 다 봤다가 밤에 떼가부러… 막 바쁜 목더리
(안거리는 집을 늘린것처럼 보입니다 만) 모르겠네요. 개량할 때도 늘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 집이라고 해서 마루에 깔린 참나무나 굴무기나무 같은 것을 사람이 안산다고 고물장사들이 다들 떼어 가버렸어요. 뒤주같으거나 참나무 궤 같은 거 전부요. 여기 밖거리에 마루는 다 떼어가 버린 거지요. 한 오년전엔가 여기 문들도 다 떼어가버렸어요. 고물장수들 다 도둑이지게. 우리같은 사람 관리를 해 봐도 아무 필요가 없어요. 낮에 봐 두었다가 밤에 떼어 가버려요. 막 바쁜시기를 타서.

(밖거리에는 정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 무사정지가 어서,.. 정지… (정지로 들어가는 문이 안보여서 그러는 건데요.) 정지…어신생이라.. 저쪽이 고팡이고.. 여긴 밖거리난 정지 어신거 담다. 여기 구들 두 개 허고.. 마리, 고팡..
(밖거리에는 정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 왜 정지가 없겠어. 정지, 정지라. (정지로 들어가는 문이 안보여서 그러는 건데요.) 그러게, 정지가 없었던 모양이네. 저쪽이 고팡이고, 여긴 밖거리여서 정지가 없었나보네.

이집의 밖거리에 정지가 없다는 것은 특이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일이다. 지금 도면에 헛간인지 정지인지 알 수가 없다고 표시를 해 놓은 위치가 정지로 쓰였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밖거리에 두 개의 고팡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적고, 쇠막과 같은 축사로 쓰기에는 외부로의 출입이 용이하지 않게 담장이 쌓여 있어서 쇠막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적다. 실제로 이 집의 이문간에는 쇠막이 있었으므로, 이 공간을 쇠막으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공간을 정지로 썼다면 마루(삼방)으로의 출입문이 직접 있었을 텐데 외부를 통해서 마루를 출입하게 되어 있어서 정지라고 보기에 어렵다.
이 궁금증에 대해서 이 집의 맞은편에 있는 1497번지의 밖거리를 살펴보면서 그 궁금증을 풀어보도록 하겠다. 2010년 12월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 집 맞은 편에 1497번지에 살고있는 문00 할머니와 그 며느리가 귤밭에서 귤을 따고 있었다. 필자는 귤밭 담을 사이에 두고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괴팡, 항만데기 놔여..(항망대기라니요?) 항만데기는 독이여 독,.. (독, 아~항아리…) 우리집에 강 봅디가? (예. 안거리는 못보고 밖거리만 보았습니다.) 밖거리 그거 돈 어서부난.. (할머니네 밖거리는 옛날에 뭘로 썻는지 궁금해서요.) 쇠막게.. 이쪽에 머꼬, 솥 십지 않읍디가. 그디 쇠 메나수게, 쇠~. ..쇠메난디개. 가운데는 삼방, 왼쪽은 구들. 뒤에 낭 디민건 괴팡….
고팡에 항망데기 놉니다. (항망데기라니요?) 항만데기는 독이여 독. (아~항아리) 우리집에 가 보셨나요? (예. 안거리는 못보고 밖거리만 보았습니다.) 밖거리, 그거 돈이 없어서. (할머니네 밖거리를 옛날에 뭘로 썻는지 궁금해서요.) 쇠막이지. 이쪽에 뭐드라. 솥이 있지 않던가요. 거기 소를 메어뒀었지요. 소 메었던데라니까. 가운데는 상방이고, 왼쪽은 구들이고, 그 뒤에 나무 쌓아둔 데가 고팡.

우리 시어머니는 안거리에, 이제 사는디 살고, 나는 떨어진 방에.. 아이고~  (한가지 여쭤보겠습니다. 밖거리에는 정지가 없었던 건가요?) 밖거리에 정지가 무사 어서, … 낭 디민디 정지행 살았주게, … 영 그디가 떨어진디가, 거기 밖거리 살 적에 요만한 냄비 두 개 아쪄그네, …
우리 시어머니는 안거리에, 지금 내가 살고 있는데 살았고. 나는 떨어진 방에.. 아이고~  (한가지 여쭤보겠습니다. 밖거리에는 정지가 없었던 건가요?) 밖거리에 정지가 왜 없겠어요. 나무 쌓아놓은 곳에 정지를 꾸며서 살았었지. 거기 밖거리에 살 적에는 요만한 냄비 두 개를 얹어서 살았지.

문00 할머니댁 밖거리는 491번지 임00씨 댁의 밖거리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문00 할머니는 지금 491번지 임00댁의 밖거리에서 용도를 알 수가 없어서 곤란해 하는 그 공간을 ‘괴팡’이라고 말하면서, 또한 ‘정지’라고 말하고 있다. 할머니의 삶을 들여다 보면, 엄밀히 그것은 고팡도 정지도 아닌 셈이다. 할머니가 처음 시집와서 기거했다는 밖거리에서 정지로 사용했다는 공간은 정말 비좁디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곳의 한켠에는 땔나무를 쌓아두었고, 안쪽에는 냄비 두 개를 두고 정지로 썼다고 하는데, 도무지 직접 보면서도 상상이 가지않을 만큼 비좁은 공간이었다. 제주에서의 정지는 돌로 솥받침을 만드는 것이 전부였고, 육지에는 흔한 굴뚝같은 것도 없었으니까, 돌만 치워버리면 정지로 썻는 지 모를 수 밖에 없다. 할머니가 괴팡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서, 그 곳을 애초에 정지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다목적공간으로 만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는 1491번지 밖거리도 마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통상 정식으로 만든 정지는 전면 출입을 하거나, 측면으로 출입하게 되어있다. 출입문이 이렇게 장항이 있는 뒤쪽으로 출입문이 하나로 되어있는 것은 애초에 허드레 공간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랬다가, 밖거리에서 살림을 따로 하는 일이 생기면 솥을 걸 수 있게 해서 정지로 사용하기도 한 것이다.
통상 제주의 민가를 유형분류를 할때 안거리를 위주로 평면 분류를 하는데, 밖거리를 유형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것은 이렇게 고정된 기능을 갖지 않은 공간이 있기도 하거니와, 변형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1497번지의 밖거리, 좌측은 살림집의 형태를 하고 있고, 우측에는 쇠막이 붙어있다.
❚1497번지 밖거리의 평면. 괴팡이라고 부르는 공간은 흙바닥으로 되어있고, 이는 1491번지 밖거리도 마찬가지이다.

❚ 1497번지, 정지로 사용했다는 밖거리괴팡의 모습.
조심스러운 생각이지만, 섯동네의 면담을 통해서 얻는 판단으로는 밖거리에 딸린 이 공간을 괴팡이라고 불렀지만, 통상 알고 있는 곡물창고인 안거리의 고팡과는 다른 다목적의 공간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정지로도 흔히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밖거리의 다양한 성격, 자녀세대들이 부족한 방으로 사용하기도 하면서 두거리가 하나의 살림을 하는 경우과 부모가 밖거리에 살면서도 자녀와 같이 하나의 살림을 하였을 가능성을 포함해서, 부모세대가 밖거리에서 별개의 살림을 하거나, 신혼의 자식이 밖거리에서 별개의 살림을 하는 경우의 모든 경우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정지로 이용할 수도 있고, 단순한 허드레 창고로 이용할 수도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공간을 수장공간으로 사용했을 때는 ‘괴팡’이라고 불렀겠지만, 취사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했을 때는 솥덕만 만들어 놓으면 정지가 되는 것이다. 밖거리에 마루가 깔려있지 않은 이러한 ‘괴팡’은 문시행 가옥의 밖거리를 정지 없는 집으로 단정 짓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5. 맺음말

하가리는 고즈넉한 고내봉과 아름다운 연화지를 품고 있는 자연환경이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줄어드는 애월초등학교 더럭분교의 학생수는 제주 농촌의 앞날을 그리 밝게만 보기에는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인구의 감소는 전통마을의 공동체문화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혼을 할 때는 집에서 잔치를 하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축하해주던 풍속은 어느새 이곳에서도 도시의 예식장을 빌어서 결혼식을 치르는 도시형 풍속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인구는 점차 감소하고 있는 반면, 삶의 모습은 오히려 도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도시를 균형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제주의 전통마을을 돌아보면, 누가 특별히 디자인을 하지 않앗음에도 불구하고 경관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전통마을의 경관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힘은 훌륭한 디자이너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주할 수 있고 적당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적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빈부의 격차가 심하면, 건물의 높이와 마감수준의 차이가 심한 격차를 보이게 되고, 이는 도시의 경관을 불균형하게 보이게 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이미 지어진 집이 쓸모가 없다고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며, 그 공동화가 보여주는 도시경관이라는 것은 바라보기 고통스러운 지경이 된다. 이는 훌륭한 디자이너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회적 환경에서 좋은 경관이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주도 농촌의 이농현상이라는 것은 매우 진지하게 연구되고, 농촌에서의 공동체적 삶이 다시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시급하다.
하가리 마을조사의 의미는 긴올레를 포함한 길의 형성과 사회조직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인 의미를 부여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인식되어진 길이라는 의미가 어떤 사회적 변화과정을 통해 이미지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길과 사회와 사회적 인식의 관계가 같이 맞물려있는 것으로 다양한 해석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며, 현대도시의 가로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도 의미 있는 해석을 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번째는 정지의 변화에 의한 가옥구조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과, 이를 통해서 하가리의 주거평면 유형의 성격과 변화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준다는 것이다. 한 지역의 주거유형의 변화는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를 이해하는 것은 사회의 변화와 함께 현대주거의 유형을 과거 초집에서의 연속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세번째는 밖거리고팡의 용도에 관한 해석이다. 이는 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단정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으나, 고착화된 기능으로 제주민가를 해석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점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한 사례라고 여겨진다. 제주민가의 거주성격을 설명함에 있어서, 이러한 제주인의 삶의 형태와 결부되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절실히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다만, 여기서는 섣부른 결론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밖거리의 성격에 대한 해석을 처음으로 시도하면서, 제주민가와 제주인의 삶의 모습을 연결하여 공간의 성격을 설명해보려 했다는 데에 조그만 의미를 두고자 한다.

<참고문헌 및 자료>
김형남, 1920~1960년대 제주시 도시주택의 유형및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 석사학위논문, 1998.
상가리지편찬위원회, 상가리지, 선진인쇄사, 2007.
오창명, 제주도 마을이름의 종합적 연구, 제주대학교출판부, 2007.
제주도, 제주의 민속Ⅵ, 해동인쇄사, 1996.
제주특별자치도 여성특별위원회 편, 제주여성의 삶과 공간, 제주문화, 2007.
‘99 건축문화축제 제주지역 추진위원회 편, 제주의 건축, 상지문화, 1999.
‘daum’ 인터넷 위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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