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자섬의 자연환경과 가옥구조

추자섬의 자연환경과 가옥구조

01. 머리말

추자섬의 자연환경과 가옥구조. 추자도는 전라도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예전부터 내륙과 제주를 이어주는 뱃길의 중간 매개지역과 같은 역할을 해 왔다. 행정구역상 지금은 제주도에 속해 있기는 하나, 오랜 기간 전라도에 속해 있어왔고 또한, 전라도의 유민들이 지속적으로 정착해 온 탓으로 언어와 풍속은 제주와는 다른 내륙의 문화적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또한 가옥의 유형적 특징으로 볼 때도 7량집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제주민가보다는 5량집을 기본으로 하는 내륙의 민가와 구조를 같이하고 있고, 남해도서지방의 민가와 거의 같은 공간구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추자도민가를 이해하는 기본 바탕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거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이러한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배경을 토대로하여 설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열쇠이기는 하나, 섬이라는 자연환경적 요인을 배경으로 바라볼 때는 또한 고립되고 제한되어진 삶의 공간에서 어떻게 환경적 제약조건을 극복해 나갔는가라고 하는 점에서는 또 다른 주거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라보는 관점을 요구하게 된다.

묵리_DSC02001

A.라포포트는 주거형태를 특징짓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연적 환경보다는 문화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비슷한 자연환경에서도 매우 다른 형태의 주거형태는 있어왔으며, 비슷한 건축재료를 사용한다고 하여도, 전혀 다른 형태 집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제주도와 추자도가 유사한 섬이라는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형태의 주거형태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문화적 배경이 주거형태의 모든 것을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도 역시 반론의 근거가 된다. 일례로 말래라는 공간이 추자도에도 있고 전라남도 해안에도 있다고 해서 추자도의 가옥이 전적으로 전라남도의 문화권의 영향 안에 놓여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은, 그 말래가 수장공간과 제사공간을 공유하는 모습이 전라도 내륙과는 또 다른 형태로 이해되기 때문이며, 차후 논의하겠지만, 말래의 성격의 제주의 가옥구조와 그 기능적 연관성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문화적 유사성에 의한 것이 아닌 자연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기능적 이유일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본고에서의 추자도 가옥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추자도의 인문적 배경이 전라남도의 영향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섬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 내륙과는 다는 성격을 보여주는 주거형태의 특징이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살펴보고 제주도민의 삶과 빗대어서 이해할 수 있는 섬사람들의 독특한 생존방식으로서의 주거문화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의 논의의 대상은 하추자의 예초리와 묵리 두 곳으로 한정하였다. 그것은 조사기간이 짧은 탓도 있었고, 예초리와 묵리가 갖는 지형적인 상대성이 두 곳을 비교해 봄으로써 추자도민의 지형에 대한 이해를 극적으로 드러내 줄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마을의 입지를 비교하여 보면, 예초리의 경우는 마을이 바다를 향해 적극적으로 돌출된 지형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묵리의 경우는 반대로 어촌마을이라고 하기에는 바다에 접한 부분이 적고 내륙 쪽으로 길게 마을을 자리 잡고 있는 특징이 있었다. 지형적으로 볼 때, 예초리는 바람과 같은 자연환경에 극히 불리할 것으로 보이며, 묵리는 어업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에는 불합리한 마을 형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선택한 이러한 마을의 입지는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두 마을의 주생활의 조건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마을은 다 과거에는 마을의 규모나 경제적인 활동이 타 부락에 비해 발달했던 시절이 있었으며, 이는 환경적으로 불리해 보이는 그들의 입지가 타 부락에 비해 특별히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서로 극적으로 다른 두 환경에서 묵리와 예초리의 사람들은 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또 그로인해 어떠한 주거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내게 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섬사람들이 갖는 강한 생명력의 근원와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으리라 필자는 기대하고 있다.

02. 바람

대체로 섬이라는 곳은 바람에 노출 되어있다. 내륙과는 달리 대개의 섬은 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장애물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때문에 가옥의 구조는 겨울에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과 여름에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마파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그림2)에서 보듯이 햇볕을 잘 받을 수 있는 좋은 좌향으로 여기는 남동향이라는 것은 섬에서는 쉬 선택하기 어려운 방위가 된다.

더욱 이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는 마을의 좌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예초리이다. 예초리는 남측과 동측으로는 높은 지형을 하고 있는 반면 북쪽과 서쪽으로는 해안으로 돌출된 지형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어서 여름 태풍에는 유리하지만, 겨울의 추운 하늬바람에는 매우 취약한 구조이다. 이러한 마을의 입지는 겨울에는 불리하지만, 어업을 생계로 하는 어촌마을이라는 점에서 남측에서 올라오는 태풍을 더 중요하게 의식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초리_DSC01990

이러한 마을의 입지는 예초리의 가옥들이 대체적으로 서향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예초리에서 면담한 김00씨(70세가량)에게 예초리의 담벼락이 매우 높은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여기가 도로나기 전에는 자갈밭이여 몽돌밭. 파도칠 때는 집안으로 들어오고, 파도막이로, 묵리는 우짝으로 많이 올랐지 않아요. 여기는 갯가쪽이 집단으로 이루고…”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예초리에 있는 집들이 모두 남서쪽으로 향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지는 쪽 해를 많이 봐야지. 여기 집을 요렇게 않으면 되겟소? 이렇게 앉으면 해풍이 심하고, 그찮아. 아, 남동으로 앉으면 해풍 때문에 그렇지. 그래서 자연히 비바람, 마파람 그런거 하늬바람,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지는 해까지 바라보기 위해서 방향을 그렇게 튼거지. 집마다 다 그렇게 돼있지.” 라고 하신다.

김00씨의 설명은 지는 해를 바라보기 위한 것이라는 운치 있는 나름대로의 설명을 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기능적으로는 해풍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설명은 예초리의 돌출된 환경과 가옥의 배치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제주북서부지역인 협재와 귀덕 등의 가옥이 대체로 남서향을 하고 있는 것도 같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묵리는 예초리와는 매우 다르게 자연환경을 이해할 수 있다. 묵리는 해안변으로는 170미터 정도밖에 면하고 있지 않은 반면, 내륙방향으로는 460미터 정도로 뻗어있다. 대개의 어촌마을이 해안변을 따라서 발달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추자도에서는 매우 특이한 마을구조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이 마을이 본디 어업을 주 수입원으로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묵리에서 만난 박00씨(74세)는 묵리가 본래 타 지역에 비해 농사를 많이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추자도는 채소류는 자급자족을 하지요… 콩, 팥, 마늘 종류는 저의 마을 같은 경우는 생계유지가 되는데, 대서리는 옛날에도 집을 크게 지어서 텃밭이 없었어요. 대서리에는 마당이 없죠. 대서리는 마당이 없는 이유가, 조그만 방이라도 만들어서 세 줄라니까, 도시식으로. 옛날에도 그랬죠. 뱃사람도 많고, 이동인구가 많았어요.”라고 말을 하고는 이어서 “저희 마을 같은 경우는 저기 짝 보시면, 전부 다 밭이었어요. 저희도 그렇고, 저 옆에도. 그런데, 삼분의 일은 저희 마을에서 농사를 지어서, 한 삼개월은 생계유지가 됐어요. 고구마, 보리, 조, 수수, 주로 많이 한 게 보리하고 고구마,… 그래갖고 생계유지가 됐으니까. 한 이십년 전에는 저희마을이 부촌이었어요. 그런데 인제 바다가 개척되고 조기가 나고, 바다에서 돈이 많이 생기고 하니까, 그쪽은 만날 농사지어봐야 돈 몇 푼 됩니까. 그러니까 바다로 나가자고 해서 바다로 나가니까 산처럼 밀어버린거지요.” 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옛날에는 묵리 쪽에서는 배를 안타는 사람도 많이 있었나요?”라고 필자가 물었더니, “많이 있었지요. 많이 있었는데, 다 전승 밀어버렸어요. 예전에는 농사지어서 부촌이었는데, 바다에 종사하다보니까, 바다에 종사하는 사람이 부촌이 되어 버렸지요. 한 오십년 전쯤에…”라고 대답하였다.

즉, 박00씨의 증언에 의한다면 50년전인 1960년대에는 묵리 주민의 삼분의 일은 농사를 지었으며, 그 당시에는 어업을 하는 것보다 농사를 짓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유리한 활동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던 것이 어업으로 인한 수입이 늘어나면서 농삿일을 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묵리의 마을구조는 본디 어촌마을이기 보다는 해안에 위치한 농촌마을과 같은 형태라고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묵리 마을회관에는 오래된 마을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묵리 해안가에는 거의 초가지붕만 보일 정도로 담장이 높은 집들이 찍혀 있었다. 박00씨는 사진을 보면서 담들이 높았던 이유를 남서풍에 의한 파도때문이라고 하였다. “왜 담들이 놓았냐 하면, 파도가 치면, 집까지 파도가 들어오니까.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방풍하는 것처럼.” “바람은 겨울에가 영향이 큽니까. 여름이 영향이 큼니까.” “이럴 때는 남서풍이 제일 컷지요. 우리 마을의 경우에는 지금도 남서풍이 크게 불어옵니다.”

박00씨의 설명대로 남서풍의 영향이 크다는 것은 여름철 태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의미이며, 이는 해상활동이 불리한 지형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초리가 북서풍의 영향에 노출되어 있지만, 남서풍에는 유리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묵리는 북서풍은 경사지형으로 인해서 큰 영향이 적었지만, 남쪽으로 경사진 지형으로 인해 여름의 남동풍이 드세게 느껴졌을 것이다. 박00씨가 여름의 남동풍을 남서풍이라고 하는 것은 묵리 해안이 마을이 서측에 있기 때문으로 바람의 방향을 남서풍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북풍을 막아주는 묵리의 지형은 바람의 세기에 대응하는 심적 부담이 예초리에 비하면 훨씬 적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집들은 자연스럽게 남향을 지향하게 되고, 묵리마을의 담장은 예초리와 비교하면 확연할 정도로 낮은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초리나 묵리는 가옥의 입구를 틀어서 들어오는 형식을 거의 반드시 채택하고 있다. 이는 제주도에서 올레를 통해 마당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세기를 줄이려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유사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바람에 대한 입지가 서로 다른 두 마을의 가옥을 비교하면, 묵리는 비교적 낮은 담장으로 바람을 완전히 차단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한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며, 반면에 차가운 겨울 북풍에 노출된 예초리의 경우에는 담장도 매우 높거니와, 가옥들이 지붕면이 보일정도로 낮은 지형에 위치하게 놓이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예초리의 해안길에 면한 주택에서는 담장높이가 2.4미터에 달하고 입구의 꺽임을 분명하게 만들어 놓아서 마치 적들을 방어하기 위한 성벽을 보는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폐쇄적인 형상이 강렬하다. 이렇게 바람에 대한 두 마을이 직면한 상황은 마을의 경제활동에도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가옥의 배치와 담장의 구조 역시 서로 다르게 대응하도록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03. 물

섬을 육지와 다르게 만드는 것은 고립된 공간이라는 것이며, 그 고립의 물리적 장애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물이다. 그만큼 섬이라는 공간에서의 생존과 물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매우 중요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묵리에서 만난 박00씨는 추자도가 내륙으로 왕래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었다고 설명한다.

박00씨는 “옛날에는 우리 조상들이요. 멜치젓 미역 해조류를 해가지고, 돗단배를 해서 목포를 가서 판매를 하고, 무동력이죠. 거기에서 일 년 묵을 양식을 싣고 오다가 홍간도 부근에서 전복 되가지고 많이 돌아가셨어요. 지금은 지붕개량이 스레트로 되어있는데, 옛날에는 초가집일 때, 전부 강진이나 해남에서 짚을 사가지고 지붕개량을 했었거든요. 짚도 돗단배에다 많이 싫고, 지금은 멸치젓을 프라스틱에다 판매를 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사기옹기, 멸젖옹기라고 있어요, 그 조그마한 것들, 그래갖고 앞마당에, 차근 차근 재 가지고, 그늘지게끔 짚 나라미나 가마니로 전 부 싸가지고, 직사광선을 못 받게 해가지고, 그 동이를 돗단배로 몇백개씩 실고 나가지요.”라고 설명하였다. “소금이나 이런 거는 어떻게 구했나요?”라고 물었더니, “소금은 돛단배로 염전에 가서 사가지고 왔었어요. 주로 젓는 노, 노로 목포까지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니까 배에 한 두 사람이 가선 안 되고, 다서 여섯 사람이 가면서, 노 젓고, 교대하고, 배에서 밥 해먹고 가면서 왕래를 했었어요.” 라고 하였다. 이렇듯 섬사람들에게 물이란, 그 들의 삶을 고립시키고 위협하는 올가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생활용수로서의 물이라는 것은 그들의 삶에서 어떤 모습이었을까? 통상 마을에서 식수를 공급받는 우물이라는 것은 중요한 공공의 장소라는 성격을 갖는다. 우물가라는 장소는 주민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모임의 장소이면서, 처녀 총각들의 만남이 이루어질 듯 한 낭만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렇게 통상적으로 이해해온 공공의 장소로서의 우물과 추자도에서의 우물은 좀 다른 국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사회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추자도의 삶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한 면을 보여줄 것이라고 여겨진다. 예초리에는 2개의 우물이 있었고, 묵리에도 8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섬이라는 곳은 물이 부족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식수에 대해서는 곤란함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 묵리와 예초리에서 공통적으로 들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독특하게 생각된 것은 우물의 물을 뜨기 위한 두레박을 집집마다 개별적으로 소유한다는 것이었다.

  묵리에서 만난 60대후반의 아주머니는 우물가에 두레박이 어디 묶여있었냐는 질문에 “집집마다 있었어. 다들 사다가 썻제. 여기서 뜨고 갖고 가고.”라고 대답하였다. 하도 의아해서 재차 “자기꺼는 자기가 갖고 가는 거예요?”라고 물었더니, “예. 예. 여기 매달아 놓는 거이 아니지. 공동으로 사용하는 거이 그런거 없었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아주머니는 두레박을 우물가에 매달아놓으면 누가 부숴버릴것 아니냐고 말하였다. 또한 묵리에서 같이 만난 이00씨(69세)는 우물을 관리하는 사람이 지정되 있었는가하는 물음에 “따로 특별히 관리하는 사람은 없고요. 일단 그 우물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관리를 하지요. 일정한 어떤 사람을 정해놓고 관리 한 게 아니고, 우물하고 가까운 사람이 더 많이 관리를 하고, … 펌프시설이 안 왔을 때는 다 자기 집에 두레박이 있었죠.”하고 대답하였다.

  왜 추자도민들은 우물가에 공동의 두레박을 매어놓고 같이 사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러한 의문이 던지고 있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육지부의 농촌사회에서 보여주던 상부상조의 미덕과는 다른 형태로 보여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독특한 그들의 생활모습을 가늠하기 위해서 돌절구라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진에서 보여지는 돌 절구가 어느 시기에 추자도에 보급되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는 이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놀라운 것은 이 돌절구가 집집마다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제주의 농촌 마을에는 소나 말을 이용한 방앗간이 있어서, 곡물을 이 방아를 이용해서 찧게 된다. 그런데, 예초리나 묵리에서는 공동으로 곡식을 찧는 방아를 볼 수 없는 반면에 거의 모든 집에서 절구를 보게 된다. 우물에서 개별적으로 사용하는 두레박과 집집마다 있는 돌절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흔히 농촌에서의 상부상조의 미덕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추자도의 모든 골목에는 물을 흘러내리기 위한 배수로가 설치되어있다.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배수로가 도로 하부에 숨겨져 보이지 않지만, 복개전에는 모든 길옆으로 물이 흐르는 배수용 도랑이 있었다고 한다. 이 도랑은 모든 집의 마당으로 연결되어있어서, 단순히 빗물을 처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집안을 청결하게 하기위한 배수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추자도의 대부분의 가옥은 바람의 영향을 고려해서 도로보다 낮게 집을 만든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모든 집들에서는 집 밖으로의 배수가 가능하도록 물길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물길이 있었기 때문에 돼지를 잡는 등의 일들이 각개의 가옥에서 할 수 가 있었다.

  묵리의 박00씨는 “ 옛날엔 하수구 물길이 다 있었죠. 그런데 하수구 물길을 다 덥개를 만들어버리니까 알로만 물이 흐르죠. 제주시 같으면 산지천 개방하듯이 개방을 했는데, 지금은 물이 흘러가는 걸 안보이게끔 복개를 해 부렀으니까 안보이죠. 한 십년이나 이십년 전에는 도살장이 있었어요. 돼지는 마당에서 잡아요. 마당에서 잡으면 물이 잘 흘르는 데서 잡아요, 아니면 내창 물이 흘러갈 때 잡아요. 먹지 않는 우물가나 내창에서 많이 잡았어요…다 집근처에 내창이 있었어요.”라고 말한다.

  필자가 만난 추자도 주민들이 사는 모습은 매우 청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한 청결한 생활 습관은 모든 집들마다 연결이 되어있는 배수로가 한 몫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추자에서 물은 그들의 생존과 직결되어있다. 물은 그들을 고립시키는 대상이기도 하고, 그들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윤활유이기도 하다. 그것을 그들은 공유하면서 누리기보다는 개인적 삶에 밀접하게 끌어들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주민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은 결코 물이 부족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지만, 집집마다 두레박을 가지고 있고, 나중에는 집집마다 펌프를 걸어서 물을 끌어들이고 있는 그들에게서 결코 물이라는 것은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풍요로운 산물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확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물이었을 것이다.

4. 가옥의 구조

그림15_묵리491번지

  그들의 삶의 모습과 추자도 가옥의 형태는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을까? 추자도 가옥의 전형적인 평면의 형태는 묵리491번지의 가옥처럼 [말리-방-정지]가 나란히 있는 모습이며, 4칸집으로 성장하였을 경우, 묵리695번지의 평면처럼 [말리-큰방-정지-작은방]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에 말리라는 공간은 수장과 제사를 겸한 공간으로 추자도의 독특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말리라는 공간은 추자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라도의 도서지방과 전남해안에서 그 명칭과 공간을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전남 도서지방에서는 말리뿐만이 아니라 공간구성의 기본모양도 거의 같은 유형을 취하고 있다.

예초리 308-1번지 빈 가옥을 실측할 때, 그곳에서 만난 아주머니에게 말리라는 공간이 어떤 곳인지를 물어보았다.

“독이 있어, 이렇게 선반 맹그는 독이 있는디, 거기다 모셔놓고 제사지낸다고, 그걸 독이라게 독.”

“항아리같은 건 아니고요?”

“응, 나무, 상자 맨크름 짜져갖고 한아버지(조상?)를 독에 모셔놓고, 제사지낸디, 물항같은 것은 부엌에 가 있었는디 다 가져가붓써.”

“그러면 여기서 제사지내고, 다른데서 제사 지내는데는 없었나요?”

“그건 모르겟소. 그것은. 우린 말래에서만 지내봤지.”

또한 예초리에서 만난 70세가량의 김00씨에게서도 말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토방이 마루니까, 여가 문이 달렸지. 여기가 말리, 그건 제사때 하는 거고.. 위패 가끔 써갖고 하니까.”라고 말리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말을 하였다. 제사를 지낼때 말리안에 있는 물건들을 꺼내놓고 하는지를 물었더니, “아니 그대로 놓고, 제상만 가지고 차리지. 말리안에선, 말리서 지내니까 제사는. (절은) 사람이 많으며는 마루에 서 갖고서 하기도 하고, 제일 큰데지 거기가.”라고 대답하였다. 추자에서는 말리에서 제사상을 차리고, 절은 사람이 많을때는 말리앞의 대청에서 절하기도 하였다는 설명이었다.

말리는 더러는 흙바닥으로 되어있다는 기록도 있지만, 현지에서 면담한 바에 의하면, 말리는 대개 마루널이 깔린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말리라고 하는 수장과 제의를 겸한 이 공간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내륙의 어느 지역에서도 그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추자도의 독자적인 공간으로 여겨지는 것은 분명하다. 이 말리가 추자도만의 독자적인 공간으로 이해되는 것은 곡식항아리를 보관하는 수장공간이면서도 ‘귀껫상자’라고 부르는 위패를 모시는 감실이 설치되어있고, 제사를 늘 이곳에서 지냈다는 특이성 때문이다. 얼핏 보면 제사를 안방에서 지내지 않고 따로 두었다는 의미에서 매우 유교적 관념이 강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현지에서 면담을 하여본 바에 의한다면, 말리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방이라는 생각보다는 단순한 창고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신동길은 남서해 도서지역의 민가에서 말리는 말리의 복합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수장공간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고 주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방과 같이 부엌에서 허드레물건을 두는 수장공간과는 달리 곡물이나 집안의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수장고라고 여겨진다.

말리라는 것이 또한 추자도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인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신양리에서 면담을 하였을 경우에는 묵리와 예초리에서는 통용되었던 말리 혹은 말래라는 명칭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마루라는 명칭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용어의 혼란은 사실 기존의 연구에서도 말리, 마래, 마리라는 다양한 호칭으로 기록되어지고 있으며, 마루방이라는 용어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제주도에서도 초집의 가운데 마루널이 깔린 공간을 ‘상방’이라고 부르는 곳도 많지만, 상방이라고 부르지 않고 ‘마리’라고 부르는 지역도 상당히 넓게 분포한다. 물론 제주도에서의 마리는 추자도의 말리와 같은 수장공간의 성격은 갖고 있지 않으며, 비교한다면 대청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연관지어 설명하기는 어렵다.

추자도의 말리는 그 형태를 본다면 전남 서해안의 말리과 같은 구조를 가지긴 하였지만, 내륙의 개방된 대청마루보다는 폐쇄된 제주의 상방을 닮고 있다. 반면에 쓰임새를 본다면, 곡물을 보관하는 수장공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제주의 삼방보다는 고팡을 닮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주의 삼방이 폐쇄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비와 바람의 영향으로 인한 환경적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으로 민가의 공간을 설명할 때, 온돌은 북방에서 전래된 폐쇄된 공간으로 여기고, 마루는 남방에서 전래된 개방된 공간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남해 도서지방을 조사한 김광언은 도서지방의 마루공간이 개방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마루가 남방에서 전파되었다는 설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게 볼때, 추자도의 가옥에서도 가옥의 앞뒤로 개방된 형태의 대청마루를 볼 수 없는 것은 문화적인 요인이기 보다는 자연환경인 비바람의 영향 탓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말리와 마루와 마리의 연관성은 혹 마루널을 깔았다는 재료적 특성과 발음상의 유사성을 들어 개연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능적으로 볼 때 수장공간인 말리와 담소공간인 마루를 동일선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반면에 말리의 위치를 제주민가에서의 고팡과 비교하여 본다면, 제주 겹집의 구조에서 고팡은 큰구들에 항상 붙어있고, 작은 구들은 정지에 붙어있다는 것을 볼 때, 큰방에 붙어서 대청과 말리가 있는 추자민가의 공간구성이라는 것은 제주민가의 공간구성과 유사성을 갖는다. 즉, [말리-대청-큰방]~[정지-작은방]이라는 일련의 공간구성은 [고팡-큰구들-상방]~[작은구들-정지]로 구성되어진 제주초가의 구성과 구성상 큰 차이가 없으며, 이때 말리는 제주의 대청마루라고 할 수 있는 상방보다는 곡물 수장공간인 고팡과 그 성격을 같이하고 있다.

1.말리 2.방 3.대청 4.정지 5.정젯방

(정젯방은 묵리 박00씨의 증언에 의한것이지만, 김광언의 조사에 따른다면 정지방이라는 명칭은 전남서해도서에서 쓰였고, 전남 남해도서에서는 모방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추자는 전남 남해도서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정젯방이라는 증언과 모방이라는 조사내용과의 차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김광언 전게서 pp.404-405.)

전남(서해) 임자도 강만희집 (김광언 378p.)

추자도의 가옥과 거의 같은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큰방과 마래와 툇마루가 한 짝을 이룬다.

전남(남해) 완도 조일환집 (김광언 396p.)

역시 추자도 가옥과 같은 구조이면서, 정지 건너편으로 작은 방이 붙는다. 추자도에서는 마래앞의 툇마루보다 넓은 공간을 토방(툇마루)와 구분하여 대청이라 불렀다.

제주도 세칸집 (제주도, 제주의 민속 Ⅳ, 518p.)

겹집구조이면서, 큰구들과 고팡, 상방이 연접하고, 정지와 작은구들이 연접하는 것은 비슷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창고에 마루널을 깐다는 것은 섬과 같이 열악한 환경에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제주의 경우에도 더러는 고팡을 흙바닥으로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대개 안거리의 고팡에는 마루널을 깔아놓은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고팡이 단순한 허드레 창고에 불과하다면 마루널을 깐다는 것이 상식적인 일은 아니다. 즉 고팡과 같은 창고에 마루를 깐다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매우 의도적인 행동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묵리에서 만난 박00씨의 부인에게 말 리가 흙바닥으로 된 경우가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아니, 다 마루 깔았어. 마루 깐 집. (마루를) 못하면은 옛날에는 세멘으로 콘크리트 딱 해놓고. 그렇게 깔고, 마루 깐 사람은 마루 깔고. 그러고는 깨끗하게 딱 하고, 명절때는 쓸고 딱고. 간간이 말리 들어가서는 청소하고 그랬어요. 그래 깨끗하게 해 놓고…”

“말리를 제삿방으로 사용할 때 지셋독, 도가지를 놔두고 했어요?”

“지셋독을 나놨지. 보쌀하고 쌀하고 담아서 나놓고 그 앞에 상 차리고. 옛날에는 양식, 보쌀(보리쌀)을 먹으께, 식구가 열이 아홉이 살았으께, 보쌀을 찧고 도가지에다 담아놔야, 안 그러면 쥐가 말리로 풍풍 뛰어 당김시로, 안 허면 다 묵어버렸지. 가마니다 담아 노면… 그래서 지세독에다 담아 뚜껑 딱딱 덮어 쥐 못 묵게 했지. 쥐가 그때는 어른 어른해서 방으로 알로 쌀항아리를 제사상 옆에 놓을 필요는 없잖아요?”

“아, 도가지를? 양식 도가지를 말리에다 싸. 그럼. 제사상 채릴 데 만 냉겨 놓고 거기다 싸. 상관없지. 양식 담아놓고 먹은 도가지여.”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스러운 것은 왜 추자도의 말리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가하는 점이다. 통념적으로 볼 때 창고라는 곳은 신성한 제의공간과는 의미적 연관성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는 말리라는 공간이 제의와 관련된 상징성, 혹은 신성성에서 그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제주의 고팡이나, 육지의 곳간에서도 민간신앙의 이유로 신성시하는 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유교적 제사를 지낼만큼의 분명한 상징적 이유를 논리적으로 끄집어내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반면에 제주의 가옥과 비교하여 기능적인 이유를 따져본다면, 말리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공간구성의 면에서 본다면, 제주에서는 큰구들의 뒤에는 항상 고팡이 있고, 고팡과 큰구들은 상방에 면해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추자에서는 말리는 대청에 면해있고, 다시 대청은 큰방 옆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세 개의 공간만을 가옥에서 떼어서 본다면, [고팡-상방-큰구들]이라는 연결고리는 [말리-대청-큰방]이라는 연결고리와 매우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제주는 겹집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팡과 상방을 앞뒤로 배치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홑집구조인 추자에서는 말리와 큰방을 앞뒤로 배치하는 것은 큰방의 크기를 작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서 그리하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그러면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어떠한 공간구조가 요구되는지를 생각해보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제사상을 차리는 공간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대기하는 공간이 구분 되는 것이 일반적인 구조이다. 즉, 제사를 지내는 순간에는 공간적의 [성/속]의 공간구분이 있어야 하는데, 제의공간이 성스러운 공간이라면,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속한 공간은 세속의 공간을 의미한다. 때문에 제주에서는 큰구들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관이 아닌 사람들은 상방에서 제사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그런데, 추자의 경우는 난방을 정지에서 하기 때문에 큰방 옆에는 정지가 딸려 붙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정지가 있는 반대편으로 대청마루가 있어야 큰방에서 제사를 지내고 대청마루에서 제사과정을 구경할 수 있는 구조가 되는데, 말리라는 수장공간이 큰방 옆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기능적 요구와 충돌하게 되어, 대청마루를 크게 만들 수 없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큰방 옆으로 말리를 두고 그 앞에 대청마루를 두어보니 홑집의 구조로는 큰방과 대청마루를 개방적인 형태로 만들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실재로 김광언이 조사한 전남 안좌도의 평면을 보면, 큰방에 대청마루가 붙어있고, 마래는 대청마루의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는 구조를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큰방에서 제사를 지내고 대청마루에서 제사과정을 지켜보는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큰방과 접해있어야 하는 공간이 수장공간인 말리보다는 제사공간인 대청마루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추자도에서도 수장공간보다 제의공간이 더 중요하였다면, [큰방-대청-말리]가 일열로 배열되면서, 큰방에서 제사를 지내고 대청에서 그것을 관람하는 구조가 되는 것이 당연하였을 것이다.

추자도의 가옥에서는 말리와 대청마루가 큰방에 같이 붙어있는 것은 수장공간으로서의 말리가 큰방 옆에 딸려 있어야한다는 당위성이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대청 못지않게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제주도에서 쌀항아리를 보관하는 고팡을 반드시 큰구들에 붙여 짓는 것이 전도에 걸친 원칙처럼 여겨질 만큼 중요했듯이 추자도에서도 곡식을 보관하는 말리가 큰방에 붙여서 지어져야 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원칙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추자도의 경우에도 쌀과 같은 곡물은 매우 귀했으며, 곡물창고라는 것은 한 톨의 쌀이라고 잘 보존해서 일 년을 버티기 위해서는 더 없이 중요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깨끗한 마루를 깔고, 호주가 기거하는 큰방에 붙여서 관리를 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제주에서 고팡을 큰구들에 붙여서 시설하는 것과 같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추자도의 민가와 주생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문화적 잣대가 아닌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에서 생존해야하는 삶의 모습을 더불어 볼 필요가 있다. 추자도의 바람과 물이라는 것은 결코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바람이 될 수 없으며, 결코 풍요롭고 고맙기만 한 물이 될 수 없다. 그들의 삶의 모습은 망망대해에서 격한 환경과 싸워야하는 고독한 전쟁과 같은 것이었으며, 이는 폐쇄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가옥의 모습을 닮아있다.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에 불과한 말리공간이 단란한 대화를 나누는 대청마루보다 더 발달할 수 있는 요인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추자는 오랜시간을 전라도에 소속되어있었으며, 전라도민들이 건너와 현재의 추자도민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언어와 문화가 전라도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때문에 여전히 추자도는 문화적으로 전라도권에 속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하지만, 문화를 형성하는 것은 문명화된 언어와 교육과 풍속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추자도가 가지고 있는 섬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은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해안의 도서와 공유하는 체질적 공통성이 있다. 그것을 필자는 농경사회가 보여주는 협업관계와는 다른 수렵사회에 가까운 강한 생존력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지금은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예초리의 저녁노을이 그들에게는 풍랑을 예고하는 경고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아모스 라포포트, 이규목 역, 『주거형태와 문화』, 열화당, 1993.

김광언, 『한국의 주거민속지』, 민음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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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성, 「추자도의 어업과 어촌 연구」, 고려대 지리교육학 석사학위논문, 1996.

김태일, 『제주의 마을공간조사보고서 ‘한림읍 협재리’』, 한국건축가협회 제주지회, 2002.

김석윤, 신석하, 「제주도민가」,『제주의 민속 Ⅳ』, 제주도, 1996.

Archi Jeju
옛말에 '배는 짓고, 집은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집을 짓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희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건축설계와 관련한 정보를 최대한 제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집을 만드는데 저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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