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필자에게 건축이 예술인가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건축은 예술활동에 들어간다고 말을 할 것이다. 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당연히 건축은 예술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건축은 그림과 같은 평면적인 회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조각과 같은 입체예술과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예술의 갖는 중요한 공통적 속성으로 작품을 통한 작가와 감상자와의 교감의 과정이 있다. 그것은 회화와 조각뿐 아니라 음악과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건축은 어떠할까? 작가는 누구이고 그것을 감상하는 감상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작품은 어떻게 전시되고 보존이 되는가? 그런 것을 따져 물으면 건축이 다른 예술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내 집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짓는다는 것은 조금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런 경우도 적지 않지만.) 집은 건축주 자신을 위한 것이다. 집을 감상하고 누릴 사람은 건축주 자신이다. 집이라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재료와 어떤 시공방법을 선택할 것인가는 남의 눈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기왕이면 내 집이 좀 더 아름답고 좀 더 완벽했으면 하는 욕심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이다. 집을 지을 때 지붕에 기왓장의 선이 일직선이 되지 않고 삐뚤 빼뚤 한다면 어느 건축주가 그것을 재밋다고 즐거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주방에 타일을 붙였는데 씽크대의 선과 타일의 선이 평행하지 않다면 누가 그것을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것으로 지나치게 고통받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최근에 감리하였던 한 현장에서는 타일의 줄눈의 굵기가 마음에 안든다고 건축주가 재시공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이럴 때는 참으로 중재하기 어렵다.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미적인 문제이고 그것은 주관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집을 짓는 데는 건축사와 건축주 그리고 관리하는 시공자와 공사하는 기술자가 관여를 한다. 이들의 마음과 생각이 같을 수는 없다. 현장에서 기술적인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미적인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쉽지않다. 예민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적인 부분이 있다면 반드시 미리 주지를 시켜야한다.
미적인 부분을 현장에서 다루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건축사라고 해도 미적인 취향에 대해서 건축주에게 강요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분명히 적절한 기술을 선택하는게 필요하며 이는 미적취향과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벽돌로 외장이 디자인된 건물을 시공하는 과정에서 재료비를 아끼기 위해서 벽돌을 반으로 쪼개서 타일처럼 얇게 만들어서 시공하자고 제안을 해보자. 그럴듯한 생각인가? 일단 벽돌이라는 재료비는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벽돌을 자르는 인건비는 추가되어야 한다. 또한 벽돌은 쌓는 재료지만 타일은 붙이는 재료이다. 이제 그것을 시공하는 시공자가 달라지면서 또한 비용이 달라진다. 그리고 기성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타일공도 통상적인 기준으로 인건비를 책정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정도 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게다가 건물이 3층 이상이 되면 타일의 탈락이 우려되서 건축사는 그 시공방법은 안전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벽돌을 반으로 쪼개서 재료비를 줄이자는 생각은 그 다음의 난관을 이해한다면 간단한 아이디어가 아니다.
만약에 선택이 가능한 경우라면 적절한 수준에서의 선택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건축에서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회자되는 건축물 가운데 싸구려 재료를 사용한 경우는 별로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건축예술의 본질이 사용된 재료의 고급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다. 능력이 된다면 비싸고 고급스런 재료를 쓰는 것을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건축재료의 선택과 건축시공방법의 선택은 적정선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 그 적정선은 사람들마다 같지 않고 주어진 상황마다 다르다. 그래서 무엇이 적정선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넓고 편평한 벽면에는 도배지를 바르는게 비용면에서 낫겠지만 굴곡이 많고 좁은 벽면에는 페인트칠을 하는 게 나을 수 있다. 적절한 재료와 적절한 기술을 선택하는 것은 최고급 재료와 최고급 기술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