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잘그린 도면

02. 잘그린 도면 건축사가 그리는 건축도면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까요? 예전에는 도면이 없어도 집을 지장 없이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왜 복잡한 도면이 필요한 것일까요? 도면이 왜 복잡해졌는지, 그리고 최소한 도면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요.

건축사라는 직업을 멋있게 포장해서 ‘행복한 삶의 현장을 그림으로 그려주는 사람’이라고 말 하기도 합니다. 의뢰인이 살 집을 도면으로 그려주고 그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것이 건축사의 일이지만, 그 행복한 순간을 그려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라는 말을 들어왔지요.

하지만 건축사가 늘 그렇게 행복함을 같이하는 직업은 아닌 가 봅니다. 아마도 많은 건축사들이 자신의 직업이 우울하다는 생각을 하기 쉬운 때가 건축법규집을 펴놓고 고민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건축사가 하는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법규와 관련된 변명을 늘어놓는 일입니다. ‘집을 설계하는데 무슨 변명을 한다는 것이지?’라고 의아해 하겠지만 건축사가 관공서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하는 도면은 온통 변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피고는 법을 어기지 않았는가?’라는 공무원의 질문에 ‘네. 저는 높이 제한규정을 준수하였고, 대지안의 공지를 확인하였고, 건축규모의 제한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집을 짓도록 설계하였습니다.’라고 변론하는 것이 관공서에 제출하는 설계도면의 주 역할입니다. 공무원과의 대화는 온통 변명과 변론을 하는 것이 주된 대화의 내용이지요. 마치 건축사가 무슨 범죄현장의 용의자처럼 되어갑니다. 그러다보니 자꾸 변명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건축도면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건축주가 지으려는 집이 건축법 및 관련법규에 적합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도면의 어느 부분이 건축법에 의한 강제규정이고, 어느 부분이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인지를 건축주가 확인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경우에는 창문의 크기를 임의로 키워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때로는 창문을 키우면 위법한 위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주차장의 위치를 옮겨도 되지만 어떤 경우에는 주차장의 위치를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상황도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건축사와 상의 없이 도면의 내용을 변경했다가는 규정에 벗어나서 재시공을 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건축도면에는 그러한 규정이 반영되어 작성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도면이 갖는 가장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요건입니다.

도면이 갖추어야 할 두 번째 요건은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계약서류로서의 적절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계약이란 건축주와 시공자간의 계약을 말합니다. 도면이라는 것은 단순히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공자와 건축주간의 공사계약을 성사시켜주는 서류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시공자가 도면과 달리 시공하였을 때에 건축주가 따져 물을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기도 하면서도 건축주나 시공자가 모두 도면이 갖는 이 성격의 현실적인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기도 합니다.

똑같은 도면을 가지고 세 군데의 건설사가 시공을 하였을 때, 똑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낼까요? 대개의 건축주들은 당연히 같은 도면으로 시공을 하였는데 똑 같이 공사를 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도면에 표기된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설계도면에는 특정의 제품을 지정하여 명기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양변기를 M사의 000번 제품을 쓰라는 식의 명확한 제품을 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설계도면에서 특정의 제품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다만 필요한 경우에 어떤 성능 이상의 제품을 사용하도록 지정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KS규격에 맞는 제품이라든지, 혹은 비중이 얼마 이상의 제품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도면에서 명확한 제품을 명기하지 않는 이유는 특정제품을 유도해서 상업적인 목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문제는 제품을 특정하지 않았을 경우에 시공자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며, 시공자는 계약 후에는 선택할 수 있는 제품 중에서 가장 가격이 낮은 제품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반적으로 설계도면이 다 작성되고 난 다음에는 그 도면으로 몇 개의 시공사로부터 비교견적을 받게 됩니다. 자, 그럼 건축도면의 화장실 평면도에는 마감재가 ‘자기질타일’이라고만 써 있는 데 시공사들은 어떻게 견적을 내게 될까요. 이점을 이해한다면 도면이 완성 되었을 때 바로 견적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타일을 파는 곳을 가 보면 얼마나 많은 종류의 자기질타일이 있는지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그 중에서 아무 타일이나 골라서 공사해 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시공자와의 다툼이 그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시공사는 자신이 제시한 견적서의 타일가격을 보고 그 범위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막상 시공사가 제시한 가격대의 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사비를 추가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서로가 도면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입장을 주장하게 되지요. 너무나도 자주 접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와 같이 설계도면이 집을 짓기 위한 모든 정보를 정확하게 알려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와 상황을 건축주는 이해를 해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에 견적이라는 것은 재료의 단가를 가정하고 만들어진 견적이 되기 마련입니다. 비교견적을 하였을 때 참여한 모든 시공사가 성실하게 견적을 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도 공사비를 높게 책정한 회사와 낮게 책정한 회사가 있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같은 도면으로 견적서를 제출하였는데 공사견적금액이 낮다고 해서 공사이윤을 적게 잡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개는 건축도면에 집을 짓기 위한 모든 정보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는 기왕이면 낮은 가격으로 집을 지어주겠다는 시공사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건축도면에는 특정하지 않은 재료가 많기 때문에 시공사가 견적을 낼 때, 어떤 제품을 최종적으로 적용하였는지 확인을 하여야만 합니다. 만약 특정의 재료를 쓰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사전에 제품명이나 제품의 수준을 먼저 선택해서 견적하도록 견적조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도면이 갖추어야 할 세 번째의 요건은 전술한 두 번째의 요건에 부합하기 위한 것인데 견적서를 작성하는데 혼선을 주지 않는 도면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공사비를 명확하게 산출할 수 있는 도면을 작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앞의 글에서 누누이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계약서의 일부라고 하는 설계도면이 명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시공사와 계약을 하고 집을 지으라고 의뢰를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설계도면과 시공견적서에는 이러한 변수들이 많이 있으며, 이러한 변수를 이해하고 그것을 미리 줄이는 것이 시공자를 선정할 때 문제를 줄이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견적을 내는데 혼선이 없으려면, 공사내용의 한계와 범위가 잘 적혀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시공견적에서의 변수를 최대한 줄이고 원하는 결과를 얻고 싶다면, 본인이 원하는 재료를 미리 조사해서 제시하고 견적에 반영하도록 하거나 중요한 재료를 지급품목으로 빼 놓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위생기기나 등기구, 에어컨과 같은 품목들이 대표적인데, 이러한 것들은 재료를 사 줄테니 설치비만 공사비에 반영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시공자라면 공사관리를 위한 비용을 통해서 이익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재료를 지급한다고 해서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통상적으로는 건축인테리어공사와 건축공사를 잘 구분해서 이해하지 않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건축 설계도면에서는 인테리어에 대한 내용들을 자세하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인테리어를 따로 발주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기본적인 마감내용을 재료마감표와 표준상세로 정리하는 정도로 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도 인테리어부분은 공사과정에서도 변동이 많을 뿐 아니라 색체나 세부적인 재료의 선정까지도 디자인 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건축설계시에 완전히 마무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에 실내마감을 특별히 자신의 취향에 맞게 만들고 싶다면 인테리어부분을 별도로 발주할 수 있도록 도면을 분리해서 정리해달라고 요청할 필요도 있습니다. 모든 분야에는 나름대로의 전문성이라는 게 있기 마련입니다. 인테리어 역시 건축사들이 바라보는 시각과는 다른 전문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는 도면이라는 것이 반드시 흑백의 선과 숫자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각종 기호의 조합으로 보이는 도면이라는 것이 집을 짓기 위한 정보를 일반인들에게 전달하는데 애로사항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문에 때로는 도면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질감과 같은 것은 사진이 더 유용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시공자가 제품을 선정하고 견적을 정확히 제시하는데 필요하다면 굳이 흑백의 선과 숫자로만 이루어진 도면에만 의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사진도 일종의 도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도면이 갖추어야 할 네 번째의 요건은 집을 표현하는데 수치로 이해할 수 있는 도면이어야 합니다. 좋은 집을 짓기 위한 정보를 정확히 전달해주는 것이야 말로 사실은 도면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중에서 가장 객관적인 언어는 바로 숫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쁘다, 빨갛다, 높다.’등의 감각적 표현은 매우 의미전달이 부정확한 방식입니다. 그에 비해 숫자는 매우 정확한 지점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창문의 폭과 높이, 실의 크기, 집의 높이, 재료의 두께와 강도, 이런 내용을 알려주기 위해서 도면에서는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숫자로 표현합니다.

의뢰인이 건축사에게 요청을 할 때에는 ‘저희 집은 높게 해주세요.’ 혹은 ‘제 방은 좀 크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건축사가 도면에 표기하는 방식은 모든 게 숫자로 이루어집니다. 어느 만한 크기가 원하는 만큼의 높이에 해당하는지, 또는 원하는 만큼의 폭에 해당하는지를 숫자로 표현해야 합니다.

간혹 배치도에 건물의 위치가 숫자로 씌여 있지 않은 도면을 볼 경우도 있습니다. 건축법에서는 건물의 위치가 허가 받았을 때와 1미터 이상 이동이 되면 반드시 설계변경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건물의 위치가 수치로 되어있지 않으면 도면에 그려진 것를 스케일자를 대고 확인해야 하는데, 이는 매우 부정확한 방법입니다.

또는 평면도에서 창문의 위치가 수치로 표현되지 않은 도면을 볼 경우도 있는데, 이 또한 시공자의 임의시공을 허용하게 되어 의도하지 않은 입면이 될 수 있는 것이어서 좋지가 않습니다. 건물을 만들기 위한 모든 내용들이 숫자로 확인 되어야만 그 누가 시공하더라도 비교적 비슷한 형태의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도면에서의 숫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심지어 저는 설계하는 것을 ‘생각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도면은 낭만적인 에세이나 개념적인 철학이 아니라, 객관적 실체를 냉정한 언어로 표현해야하는 매뉴얼입니다. 물론 건축사가 설계한 건축물에는 어떤 의미 있는 철학과 가치관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면에는 그러한 철학과 가치관을 쓸 필요도 없고 쓰지도 않습니다.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숫자로 나타내는 것이 도면입니다.

Archi Jeju
옛말에 '배는 짓고, 집은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집을 짓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희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건축설계와 관련한 정보를 최대한 제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집을 만드는데 저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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