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작품과 작가 그리고 의뢰인

작품과 작가 그리고 의뢰인

예술활동이라는 것도 인간만이 누리는 문화적 삶의 한 단편입니다. 인간이 아닌 어떤 동물이 예술활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요. 아무리 어떤 동물이 높은 지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고작 간단한 도구를 이용할 수 있는 정도이지 예술활동을 한다는 것은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문화라는 것 자체가 자연과는 매우 멀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과 규율 그리고 사회조직 등 수 많은 유형 무형의 결과물들이 자연적인 삶을 거부하면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아무리 생태적인 삶을 지향한다고 하여도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가서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술과 문화는 자연상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삶과는 전혀 다른 형태이지요. 집은 그 탄생 배경 자체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고안된 것입니다. 맹수로부터 그리고 매서운 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지요. 집을 생각하고 만드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자연과는 점차 멀어지는 삶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도덕적 가치, 전통적인 삶, 그리고 공동체적인 윤리의식 등도 사실은 자연과 점차 멀어지는 삶을 선택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요.

문화와 예술활동이라는 것이 자연적 삶과 멀어지는 인간만의 행위라는 것을 굳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유산을 만들어 왔는지를 입증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집이라는 것 역시 매우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건축물도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건축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꼭 이해해야 할 것이 건축과 예술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입니다. ‘그래 당연히 건축도 예술이겠지. 그렇다고 하자.’라고 해 버리면 간단한 일이지만, 건축설계과정을 이해함에 있어서 건축디자인이라는 예술활동이 다른 예술활동과는 어떻게 다른 지를 이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물론 저의 생각도 하나의 견해에 불과합니다. 또한 제각기 건축사들마다 건축디자인이라는 예술활동을 바라보는 입장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건축역사를 보면 위대한 건축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그리스의 파르테논과 같은 건축물들이 등장합니다. 물론 훌륭한 예술작품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고안한 작가가 누구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경복궁이나 숭례문 역시 그렇습니다. 훌륭한 예술품들의 경우 대개 작가가 누구인가하는 것이 중요한데, 작가를 알 수 없는 경우는 보통 ‘작자미상’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자미상이라고 하기보다는 인류 자체가 작가인 경우도 있습니다. 거대하고 위대한 건축유산들이 대개 그러합니다. 건축물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부재들의 디테일들이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누적된 지식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의 위대한 건축물은 한명의 작가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오랫 동안 누적된 지식이 훌륭한 예술품으로 탄생되기도 합니다.

특정의 건축물이 누구의 작품인가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경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베니스에서는 동양과의 교역을 바탕으로 한 거대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던 메디치가와 같은 자본가들이 예술가들에게 지원을 하면서 소위 문예부흥으로 알려진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게 되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는 건축에서뿐 아니라, 미술과 조각 그리고 음악에서도 작가와 작품이 명확한 한 세트로 인식되는 시기의 시작이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그러면서 매우 뛰어난 예술품인데도 불구하고 작가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작자미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됩니다. 작가가 없는 예술품은 생각하기 어렵게 된 것이지요.

간혹 민화 또는 민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민화와 민요는 작품성이 뛰어난 경우에도 그 작가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어서 아쉬움을 주게 됩니다. 대한민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고, 재 편곡이 즐겨 이루어지는 ‘아리랑’ 역시 뛰어난 예술이지만 원작자를 알 수 없는 경우이지요. 이러한 민화와 민요 역시 한사람의 뛰어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인류의 역사 자체가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흥얼거리던 음성이 민요가 되고 훌륭한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훌륭한 작가에 의한 소설도 있지만 누군가가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각색하고 변형하며 전해내려 온 전설과 신화와 같은 구전문학도 매우 훌륭한 작가 없는 예술품들입니다. 00가 쓴 ‘건축가 없는 건축물’을 보면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작가 없이 인류가 만들어내 위대한 유산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건축사라는 전문직업이 없었던 시절 이웃이 서로 힘을 보태어서 집을 만들었던 민가처럼 종합적으로 공동체의 세계관을 정확히 반영하면서 예술성도 높은 건축물은 찾기 어렵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르네상스를 기준으로 한다면 인류역사에 작가라는 호칭이 등장한 것은 겨우 600-700년 정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소하게 생각되는 이쑤시개 하나까지도 아무런 고민이 없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없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생산물에는 작가가 누구인지를 말 할 수 없는 경우가 여전히 많습니다. 우리가 자연물을 가공해서 만들어낸 모든 생산물에는 그것을 고안해낸 작가적 고민이 들어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작가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작가와 작품을 연결시키는 데에 실패할 뿐입니다.

한편 생각해보면 모든 문화적 생산물의 작가를 꼭 알아야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작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생산물도 있습니다. 이쑤시개를 어떤 모양으로 어떤 굵기로 할 것인가 고민한 사람은 분명 있겠지만 그것을 누가 디자인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고 따지지는 않았습니다. 매우 훌륭한 자동차 디자이너는 있겠지만 불행히도 아직은 자동차디자이너의 명성과 영향력은 차를 구입하는 대다수의 소비자에게까지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자동차의 선택에 있어서는 그것을 디자인한 작가보다는 오히려 어느 회사에서 제작하였는지가 더 중요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여전히 우리는 작가와 작품을 일대일로 연결 짓는 데는 그리 성공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 작가라는 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걸까요? 창작활동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저 마저도 작가라는 분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가끔 의문을 갖습니다. 자본가에 의해 시작된 건축예술에서의 작가라는 호칭과 명예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가끔은 홀로 남은 제 작업실에서 생각해보고는 합니다. 정작 누군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것은 메디치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작품을 소유하고 싶어 했던 자본가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작가라는 호칭 역시 사실 쟁이에 불과한 그들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라 소장 작품의 가치를 높이고 싶었던 자본가들의 기획에 의해서 탄생한 것은 아닐까요?

정작 예술품을 만든 장인에게 중요했던 것은 작가라는 호칭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작가의 명성이 중요해진 것은 마치 명품가방의 회사가 제품의 질을 보증한다고 믿는 것처럼 작품 자체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작가의 유명세에 기대어보려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 건축작품이라는 것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작가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건축작품이라는 것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작품은 왜 만들어지는 것일까? 보통 예술작품이라고 하면 열정에 사로 잡힌 예술가가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밤낮을 잊고 정진해나가는 과정을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위에서 그런 고귀한 삶을 살아간 작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타이티섬으로 떠난 고갱이나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외로운 삶을 살아간 이상과 같은 시인이나 취객이라는 영화에서 소개되는 장승업과 같은 작가들의 열정은 우리를 뜨겁게 합니다. 그 열정이 녹아난 생산물을 우리는 특별히 작품이라고 높여 부르게 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품 역시 생산물입니다. 어떤 작품이든 그것을 만들려면 비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단순히 열정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중섭은 가난했던 시절에 답배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지만 일반적으로 어떤 작가들이든지 작품을 만들기 위한 비용은 필히 사전에 준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영화감독이 훌륭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어도 투자자를 만나지 못하면 영상화하는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림이나 음악 그리고 문학과 같은 경우에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자본보다는 작가적 열정이 훨씬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작품제작을 위해 시간만 있으면 되는 경우라고 할 지라도 실은 그 시간 자체가 바로 비용으로 환산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보편적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구되는 비용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는 있겠지만 생존을 전제로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을 비용 없이 얻을 수는 없습니다.

건축작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갑자기 제작비용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된 점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건축예술의 속성에는 이러한 작품과 비용, 그리고 작가와 자본가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합니다.

계속해서 예술분야에서 투자비용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예술활동 중에는 영화처럼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자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야도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본이 없이는 영화로 탄생할 수 없습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본이라는 것은 어쩌면 웬만한 건축물을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건축예술은 어떨까요? 당연히 자본가의 지원 없이는 건축예술은 그 존재자체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물론 간혹 폐자재를 모아서 혼자서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사건도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는 일반적인 경우라 할 수 없지요.

그런데 건축작품에서의 자본의 문제는 단순히 투자한다는 의미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음악가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감을 언제든지 악보로 옮겨 적고 악기로 연주해 볼 수 있습니다. 대개의 화가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나서 남들에게 전시회 등을 통해 선을 보이게 됩니다.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영화감독은 투자자를 만나기 전에 좋은 시나리오를 먼저 물색하게 됩니다. 대개의 예술활동은 작품이 발표되거나 제작되기 전에 미리 작가의 의지에 의해서 먼저 실행이 되게 되지요.

하지만 건축에서는 작품을 미리 만들어서 전시하고 투자자를 나중에 만나서 설득하는 방식으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건축작품은 항상 투자자의 요구가 먼저 있어야가 실행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요구가 없는데 단지 건축가의 개인적인 생각을 도면으로 그려보고 그것을 직접 건축물로 만들어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간혹 의뢰인이 없이 상상속의 건축물을 그리는 건축가도 있지만 그것을 지어보지는 못합니다. 지을 수 없는 건축도면을 그려본다는 것은 마치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을 악보로만 그려보는 동결된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지어질 것을 전제하지 않은 건축스케치는 건축예술이기 보다는 차라리 미술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열정적이고 천재적인 건축가도 자신의 영감을 자기자본으로 미리 만들어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물론 그게 설계자 자신이 살거나 이용할 집이라면 한번 실현해 볼 수 있겠지만요.

건축예술은 그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지위에 우뚝 서서 지어졌을 때 평가가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을 구체화하여 예술품으로 완성하기 위해서 수억의 돈을 미리 써버릴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건축예술은 기본적으로 의뢰인 즉, 자본가의 요구가 먼저 있어야만 실행할 수 있는 주문에 의한 생산행위입니다. 마치 우리 집에 필요한 다기를 만들어달라고 도공에게 주문하면 그때야 도공이 흙을 빗고 작업을 하는 것과 같은 시스템이지요.

물론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건축물도 미리 만들어놓고 판매하는 방식이 없지는 않아요. 주로 아파트와 같은 건축물은 사용자를 미리 상상하면서 디자인도 하고 건설을 하게 되고 그것을 모델하우스라는 것을 보면서 소비자가 구입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지요. 최근에는 개인주택에서도 미리 디자인된 샘플을 카달로그와 같은 것으로 보고 도면을 주문하는 방식도 새롭게 등장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일단 저는 그러한 경우는 배제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집을 디자인하는 입장에서 볼 때 미리 건축주를 예상하고 분류해서 디자인하는 방식을 건축예술이라고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감이 있네요.

그런데 제가 제기하려는 문제는 건축예술에서 의뢰인의 위치가 작가 못지않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화를 제작하는데 있어서 투자자는 자본을 대지만 영화내용에 대해서는 침묵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투자자는 자신이 시나리오 작가도 감독도 아닐 뿐 아니라 소비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투자자는 단지 그 영화에 자신이 투자해서 비용을 회수하거나 이윤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가 주요 관심 일 것입니다. 하지만 건축에서의 의뢰인은 그러한 투자자와는 전혀 다릅니다. 의뢰인을 보통 건축주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실질적으로 그 건축물의 주인이며 그 건축물을 점유하여 사용 할 사람인 것입니다. 때문에 건축사가 설계한 건축물이 의뢰인 자신이 원하는 그러한 모습인지를 따져 묻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 입니다. ‘창을 크게 해 달라.’든가 ‘출입문은 이쪽 방향으로 해 달라.’, ‘외장재는 벽돌로 해 달라.’ 하는 등등의 요구는 자신이 소유할 건축물을 의뢰한 건축주로서는 당연한 권리입니다. 건축사라고 해서 그러한 요구를 부당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요.

건축이 예술인가 아닌가하는 논의는 실은 제가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주제입니다. 당연히 건축설계는 예술행위입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위와 같은 이유로 건축설계라는 행위의 주체 즉, 건축예술작품의 작가를 오로지 건축사라고 만 보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 점이 특히 건축예술이 다른 분야와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오랜 역사 속에서도 특정의 건축가가 없이 집은 지어져 왔고 건축 디자이너가 작가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어도 그 혼자 모든 것을 기획하고 만들어온 적은 없습니다. 집을 구상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공동작업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누구와 누구의 공동작업을 말할까요? 건축예술에서 의뢰인은 단순히 건축작품의 제작비를 제공하는 투자자가 아니라, 기획과 설계과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건축작품의 결과에 영향을 주는 실질적인 작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진 두 부류의 사람이 만나서 집을 구상하는 것이 바로 건축설계라는 것입니다. 한쪽은 집을 구상하는데 익숙한 사람이며 다른 한쪽은 그 집을 실제로 사용하려는 사람입니다. 의뢰인은 자신이 갖고 싶은 집을 그려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원하며, 건축사 또한 자신이 구상하는 집을 구체화하기위해 투자 할 수 있는 의뢰인을 원하게 됩니다. 사실 집을 구상하는 것은 둘 다 하고 있는 일입니다. 세상에 자기가 살집을 ‘돈을 얼마든지 대줄테니 당신 마음대로 설계하시오.’라고 할 의뢰인도 없거니와 전혀 건축에 문외한인 의뢰인이 요구하는 대로 그냥 도면을 그려주겠다는 건축사도 없습니다. 분명히 집을 디자인하는데 있어서 둘 다 능동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집에 대한 구상은 누가 먼저하고 있을까요? 당연히 의뢰인입니다. 건축사는 의뢰인에게 요구를 받기 전에는 그 설계과정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건축설계의 첫 시작에서 건축사는 의뢰인의 구상을 듣고 이해하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문제는 건축사 역시 집을 구상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의뢰인이 건축기술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이미 갖고 있다고 한다면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도면화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모 대기업 회장님은 자신이 건축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확신이 있다고 판단해서 스스로 스케치한 안으로 설계할 것은 건축사에게 요구하고 그렇게 사옥을 지었다고 합니다. 분명 좋은 방법이 아니죠. 회장이라는 지위가 모든 능력에서의 우위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살고 싶어 하는 집이 어떤 모습이었으면 하는지는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사실은 대단히 허점이 많은 생각일 뿐입니다. 건축주 자신에게 가장 심각한 피해를 주는 좋지 않은 상황은 당신의 집을 설계하는 건축사로 하여금 ‘그래,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려줄게.’라는 결심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문가인 건축사를 수동적인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정말 위험하기 그지 없는 상황입니다.

건축사와 의뢰인의 만남에 있어서 서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상대를 존중해주라.’는 것 입니다. 좋은 집을 구상하는 데 있어서 누가 주도적으로 그것을 끌고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건축사든 의뢰인이든 자신이 더 주도적으로 구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좋은 집을 구상하는데 실패하기 쉽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또 공유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건축사를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의뢰인이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데, 무언가를 요청할 때 “~게 해주세요.”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창을 크게 내 주세요.” 또는 “현관은 남쪽으로 해주세요.”라는 식의 요청입니다. 이왕이면 “~하면 어떨까요?”라고 건축사의 생각을 되물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창을 크게 내면 어떨까요?” 라든가 “현관을 남쪽으로 하면 어떨까요?”라는 식으로 건축사의 생각을 물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질문법에 대한 주의가 중요한 것은 건축디자인이라는 것이 결코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요청은 건축사에게도 당연히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건축사라고 하더라도 의뢰인의 의사를 무시한 독단적인 행동은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고 하더라도 의뢰인에게 필요하지 않은 작품을 제안한다면 그건 정상적인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건축예술에서는 그렇습니다.

건축작품과 작가라는 소재를 통해서 이야기하려는 건축사매뉴얼의 이야기는 건축물을 구상하는데 있어서 건축사와 건축주는 동등한 작가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입니다. 건축사로 하여금 의뢰인이 원하는 집을 신나게 구상하게 하기 위해서 의뢰인은 건축사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잘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의뢰인으로 하여금 좋은 집을 위한 구상을 제대로 하게 하기 위해서 건축사는 의뢰인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잘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건축사 매뉴얼은 반대로 의뢰인 매뉴얼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의뢰인은 자칫 자기는 건축을 잘 모르니까 요구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집을 원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는 방법을 의뢰인 역시 찾아야 합니다. 그게 글이 되었든 사진이 되었든 아니면 서투르더라도 그림이나 도면이 되었든 생각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의뢰인 역시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지 못한다면 건축사는 의뢰인이 전혀 갖고 싶지 않은 엉뚱한 집을 그릴지도 모릅니다. 원하지 않는 설계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건축주가 갖고 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결코 건축주 역시 건축사의 설계를 방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건축설계를 직접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직접 그리려고 하기 보다는 좀 더 긴 시간을 두고 대화를 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건축사에게 도움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Archi Jeju
옛말에 '배는 짓고, 집은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집을 짓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희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건축설계와 관련한 정보를 최대한 제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집을 만드는데 저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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