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도동 고씨 살림집 단상

제주도에서 오랜 기간의 출륙금지의 조치가 풀린 것은 대개 1820~1850년 정도의 시기로 보고 있다. 하지만 출륙금지의 해제는 자유를 향한 고삐풀림이 아니라 새로운 구속과 억압의 시작일 뿐이었다. 일본과 거리적으로 가까웠던 제주에게 일제강점기는 또 다시 우울한 시간을 연장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일제에 의한 강점기에는 새로운 문화에 접하게 됨으로써 막닥뜨리게 되는 문화적 충격이 곳곳에 스며들게 된다. 흔하게 현장에서 들려왔던 야리가다, 사뽀또, 함마 등의 일본어와 일본식 발음에 익숙하게 되었고,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제주에는 벤또와 보구떼, 바께쓰와 같은 일본어가 강점기 이후에도 오랜 시간동안 마치 우리의 언어처럼 사용되었다. 특히 건설현장에서는 그 정도가 심하였는데 이는 제주인들이 근대의 건축기술을 일본인을 통해서 많이 습득하였기 때문이다.

강점기기간에 지어진 살림집에도 이러한 일본건축의 영향이 스며드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제주성안의 많은 집들이 전통적인 7량의 가구법에 의한 지붕구조가 아닌, 간이 트러스형태의 목구조로 만들어졌다. 일도일동에서 강점기시기의 살림집의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것으로 고씨살림집이 있다. 건축물대장상에는 이 살림집의 준공시점을 1949년으로 기록되어있으나, 김형남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의 거주인 문순여씨 면담결과 192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 하고있다. 이를 고려하였을 때에도 고씨살림집은 강점기의 일본건축의 영향 속에서 제주인의 살림집이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고씨살림집은 안거리와 밖거리의 별채구성으로 되었다는 점에서 제주의 살림집의 기본구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밖거리는 마루공간과 구들이 반복되는 공간구조를 하고 있어서 얼핏 보기에도 안밖거리의 딴 살림을 하였던 일반적인 제주의 살림의 구성과는 전혀 다른 공간구성으로 보인다. 현재의 공간구조는 최초의 공간구성과는 변형이 많이 이루어진 것이며, 김형남의 실측조사도면에 의하면 후면에 정지가 있고, 우측에 있는 마루는 고팡 이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전통적인 민가의 공간구성과는 전혀 다른 변형된 평면임에 분명하나 두거리의 살림집의 구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고씨살림집을 통해서 제주의 살림집의 변화는 어떤 점을 볼 수 있을까? 우선 안거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상방에서 정지에 이르는 중복도가 만들어진 점이 눈에 띄인다. 전통적인 제주의 살림집은 규모의 한계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중복도로 공간을 연결하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중복도를 만든다는 것은 더 많은 공간확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제주의 살림집의 전면부에는 복도의 역할을 하는 낭간과 같은 공간이 있고 일본건축에도 전후면에 복도를 두고 아마도(雨戶)를 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살림집의 주변부에 복도가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이는 살림집의 규모가 커지면서 공간의 연결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복도는 근대건축의 탄생과 시기를 같이하고 있다. 살림집의 공간규모가 커졌을 때 발생하였던 내부공간을 분할하기 위한 두 가지 방식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즉 복도를 두어 각 공간을 독립적으로 사용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복도가 없이 적당히 칸나누기를 하여 홀과 방으로만 구성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고씨살림집의 경우에는 복도와 개별 공간의 독립된 구성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씨살림집에서 감지할 수 있는 두 번째의 변화는 역시 집을 짓는 기술적인 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밖거리에서는 대들보 위에 종보가 없는 간이 지붕틀구조로 되어있다는 점이나 각방에서 벽장이 있는 벽을 제외한 면에는 미서기 문을 설치하는 것 역시 일본건축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적인 변화는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부의 축적현상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본래 제주의 전통 살림집의 집짓는 과정은 수눌음과 같은 공동체 문화와 관련이 깊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흙질과 초가지붕 덮기를 부주로 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도시화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빈부의 격차 등은 수눌음에 의한 집짓기 방법이 용이하지 않은 방향으로 사회는 흘러가고 있었다. 이는 살림집의 규모가 고씨살림집처럼 상당히 커지게 되면 공동체의 도움에 의존한 흙질을 통하여 집을 짓는 방식보다는 목수와 기와쟁이와 같은 기술자들에 의한 건축방식이 오히려 더 선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일본건축기술이 쉬 받아들여진 것은 단순한 기술의 도입이 아니라 근대화의 과정에서의 사회의 변화가 반영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화북에서는 왜 근런 수눌음이 덜 했을까요?] 거기에는 호수가 좀 많잖아. 해변에 사는 사람 그 당시에는 차별이 있었어. 시골에 사는 사람하고, 해변에 사는 사람하고 인간차별. 시골놈. 촌놈이라고 했거든. 해변놈은 양반계급에 속하는 조금 우대받는 사람에 속했고. 그런 차이가 있었어. 그러니까 여간하게 인간관계가 다져지지 않으면 봐주지 않았어.

유00(1937년생,남,일도이동), 2018년7월9일.

영평에 살다가 소개령에 의해서 화북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유00씨는 영평에서와는 달리 화북에서는 수눌음에 의한 건축을 하기가 어려웠다고 하였다. 이는 호수가 많아지면서 사회적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흙벽을 줄인다는 것은 건축물이 밀집한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필요성이 절실해진다. 이는 지금도 도심일수록 철근콘크리트보다는 철골구조가 유리하고 미장과 같은 습식공법보다는 철물에 의해 마감재를 고정하는 건식기술이 선호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한두 명 기술자의 손을 빌어서 미서기문과 목재널을 이용해서 공간을 구획하는 방식은 온 마을사람이 동원되어서 마당에서 흙을 이겨서 벽체를 만드는 방식보다 훨씬 편리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또한 산업화로 인해 제재목(製材木)이 쉬 수급이 가능해진 점 등도 그러한 변화를 점차 받아들이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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