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과 건축

이주민과 건축 ❚ 이주민의 꿈과 그들이 요구하는 건축.

최근 제주도에서는 건축의 부흥기라고 할 만큼 많은 설계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야 있겠지만, 제주로 이주를 희망하는 새로운 주민들이 많아지면서 그들에 의한 건축설계 일들이 많아진 것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주민들에 의한 건축설계는 단순히 일감이 늘어났다는 차원과는 다른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이 달라지고 있고, 또한 왜 달라지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건축사인 우리에게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요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이주민들은 어떤 건축디자인을 요구하고 있는지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숙제를 던지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보자.

첫 번째, ‘길 떠남’ 속의 자기애(愛)와 건축 디자인에 대한 애착

의미 없는 질문일 수 있지만 누구나 가끔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막연한 질문 속에는 오랜 시간 인간이 해결하지 못했던 삶에 대한 목마름이 담겨있다. 그 질문은 자신의 근원을 묻는 정체성의 문제, 삶의 가치를 묻는 의미의 문제, 타자와의 관계를 묻는 존재방식의 문제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 질문이다.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며, 공유할 수 없는 다른 형태의 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화두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 버려진 것 같은 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듯 하지만 이 질문에 답을 얻고자 과감히 길을 떠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마치 혜초가 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여행을 떠나고 유리가 부러진 칼을 들고 아버지 주몽을 찾아가듯이 간혹 용기 있는 이들만이 자신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고자 정든 집을 떠나 여행을 한다. 그게 마치 아벨처럼 먼 길을 떠난 뒤 후회를 안고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이 될 지라도 말이다.

건축이론에서의 현상학적 접근은 이러한 ‘길 떠남’ 보다는 어느 한 장소에서의 정주함에 주목하여왔다. 인간은 정주함으로써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는 것이 장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이다.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확인하는 것은 정주하는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과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생활세계에 대한 관점이다. 길을 떠난 이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맨 첫 단추는 삶을 고정시킬 수 있는 정주장소를 찾았을 때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 제주를 찾아 올 때에는 얼마나 많은 용기와 준비기간이 필요했을까. 그리고 어떤 목마름이 그들의 정주지를 버리고 새로운 공간을 찾아 정착하고자 하는 용기를 내게 하였을까. 그리고 그 길떠남의 원인속에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길 떠남’이라는 선택은 그것을 적절하게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이 은연중에 강요하고 있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의 건축이 요구하는 첫 번째 이야기는 이 ‘길 떠남’에서 시작이 된다. 아직은 장소화되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깃대를 꽂는다.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고. 그 영역표시의 첫 단계에서 건축사를 찾아가게 되는 것이며 타자에 대한 이해가 성숙되기 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건축을 요구하게 된다. 이 위험한 첫 걸음은 미지의 세계로의 탐구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는 매우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모험정신으로 무장되어있다. 이들에게 제주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반면에 그들은 ‘이렇게 좋은 제주를 제주인은 잘 모른다.’는 이야기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한다.

제주인들이 오히려 제주를 잘 모른다고 하는 이야기에는 그들이 제주를 찾아오면서 가졌던 환상이 더 제주를 잘 설명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들이 목도한 제주는 무엇이고 그들이 세우려는 건축은 무엇일까. 본래 살던 터전을 떠나 제주로 찾아온 이들에게는 독특한 자기 인생에 대한 애착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애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보다 성숙해질 때 비로소 인생에 대한 진솔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가 터져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제주에 대해 적절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의 선택은 주변과 어울리는 디자인이기 보다는 개성이 강한 독특한 디자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의 건축은 시작되고, 자기애가 충만한 그들의 건축이 요구하는 바는 다양한 형태로 제주를 공격하게 된다.

두 번째, 그들의 집짓기와 건축사의 건축설계

그들이 원하는 건축이 어떤 것이기에 건축사들이 설계를 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가. 그 두 번째 이야기는 정보수집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두 번째의 이야기는 건축사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이슈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불과 2~3년 전만해도 서점에서는 일반인을 위한 건축서적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그중에는 건축 관계인이 쓴 책도 물론 있지만, 일반인이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쓴 경우도 심심찮게 보인다. 부담스러운 고백이지만 그러한 책들이 인기를 갖게 된 이면에는 건설업자들에 대한 불신뿐만 아니라 건축사에 대한 불신 또한 어느 정도 깔려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최근 경향신문의 컬럼을 보면, 집을 짓는데 건축사가 과연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과감하게 던지는 경우도 있었다. 도데체 이러한 불신을 던질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

집을 짓는데 필요한 전문지식이라는 것이 이제 전공이라는 울타리에서 풀어져 나와서 일반인의 책상위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러브하우스와 같은 방송을 통해서 건축사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 점차 몇 권의 에세이와 같은 책으로 발전하였고, 이제는 직접 집을 지었던 경험들이 인터넷상에서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현장경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전문가를 위협하는 인터넷 정보의 공격은 건축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의사들도 변호사들도 똑 같은 위협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는 대학교수들도 이러한 공격을 받고 있다. 게다가 건축설계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건축설계라는 것은 대단히 보편적이고 지극히 상직적인 지식들이 모아진 것 아닌가. 주방이 어떠하면 좋겠다든가 거실이 어떠했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데 특별한 전문지식을 요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상태에서 건축설계분야에서의 광범위한 인터넷 정보의 공격은 매우 구체적이고 예리하다.

최근에 집을 지으려는 까다로운 의뢰인으로 인해서 고통 받는 건축사가 적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그들은 건축사를 찾아오기 전에 이미 많은 건축디자인을 인터넷을 통해서 섭렵을 하고 찾아온다. 인터넷상에서 본 멋진 집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의뢰인들에게 건축사가 그들에게 보여주는 디자인이 쉽게 흡족할 리가 없다. 이러한 상황은 공사현장에서는 더욱 심각한 일이 벌어진다. 사진으로 보았던 이미지를 건설기술자가 현실적인 문제로 비판이라도 하려고 하면, 실력 없는 촌놈취급하고 무시하기도 하고, 현장여건과는 무관하게 이런저런 재료를 뒤죽박죽 섞어가면서 스스로 인테리어를 해본다고 난리를 치고 나서야 후회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대개 이러한 상황에서 건축사도 건설기술자도 소신 있는 판단으로 건축주를 설득하려하기 보다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식으로 접근하고 만다. 환자가 스스로 병을 처방하고 의사는 환자의 의도대로 처방전을 써주고는 그게 당신책임이라고 물러서는 꼴이다.

이주민의 건축과 제주건축의 새로운 과제

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문제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건축설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할 상황이 ‘스스로 자신의 집을 구상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면, 이 태도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건축사들의 역할과 입지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배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것은 건축주 자신들도 건축설계과정에 참여시켜달라는 것이다. 묵묵히 건축사가 제출하는 결과물만 바라보면서 감탄을 하던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디자인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디자인은 자기가 할테니 건축사는 도면을 그려주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요청을 너무도 당당하게 한다.

건축사들은 이러한 상황을 간혹 비관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건축주들이 건축사를 괴롭혀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르네상스시대의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역시 자본가의 괴롭힘 속에서 작품을 해 왔고, 근대건축의 거장들도 건축주와의 갈등이 에피소드로 전해오기도 한다. 제주의 건축사들이 만나게 되는 새로운 유형의 건축주인 이들도 과거와 다름없이 스스로의 욕구를 가지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건축주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들과의 교감을 통해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설계한다는 건축사에게 부여된 기본적인 의무는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의 배경이 이주를 꿈꾸는 새로운 유형의 건축주로 하여금 스스로의 디자인욕구를 구체화시키는 방법들을 터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건축사들이 모더니즘과 해체주의를 학습하고, 전통과 지역적 맥락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동안 건축주들은 취미와 취향, 그리고 재료와 색상, 공사비 등에 자신의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건축사들이 건축의 거시적인 문제를 사회적 입장에서 토론하는 동안 건축주들이 자신의 집을 짓는데 필요한 극히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건축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이는 어느 한쪽의 관심이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주민에 의한 건축을 생각하면서 간만에 월정리 해변을 찾아갔다. 근 일 년 동안 제주도에서 가장 관심 있는 지역으로 급부상한 곳이기도 하지만, 그 만큼이나 요란한 건축물로 시각적 공해를 일으키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이 만들어내고 있는 건축경관을 보면서 나는 건축주의 요구에 의해 무너져버린 건축사의 자존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각기 다른 취향과 다른 욕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월정리의 건축의 형태는 혹 벤츄리가 적극 지지한다고 하여도 결코 우리가 지향해왔던 모습은 아니라고 믿는다. 월정리 건축디자인의 실패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얼마나 험난하고 위험한 것인가를 실감하게 한다.

건축은 건축사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건축주의 손에 맡기어서 내두어서 될 수 있는 분야 또한 아니다. 지금 당장에 고민해야 할 부분은 건축사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최근에는 집짓기를 가르쳐준다는 건축학교라는 타이틀을 내건 업체도 생겨났으며, PM(Project Manager)이라는 명함을 만들고서는 건축주를 대신하여 집짓는 과정을 서비스한다는 이들도 생겼다. 육지에서 제주도에 온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인터넷카페에서는 부동산업자나 건축사를 만나서 겪은 이야기들이 경험담처럼 올라오고, 제주의 건설업체를 믿을 수 없다며 스스로 건설조직을 만들어서 그들끼리의 영업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 속에는 인터넷정보에 대한 맹신과 더불어 제주의 건설업자와 공인중개사 뿐 만 아니라 건축사에 대한 불신도 배경에 깔려있다. 이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상담과 협력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

불행히도 나를 포함한 대개의 건축사들은 인터넷정보를 잔뜩 머릿속에 입력하고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건축주를 요령껏 설득하여 건축의 제반 문제를 이해시키는 방법론을 배운 적도 고민 해본 적도 없다. 건축주들의 요구는 엄청나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설계방식은 특별히 진전된 것이 없는 게 현실이다. 막연한 작가적 자존심만으로는 그들이 내미는 사진속의 공간과 디자인을 흉내 내는 것조차도 쉽지 않다. 대부분 건축사들이 대학 졸업 후 10년 이상을 건축사사무소에서 설계만을 했건만 건축주의 요구를 소화해내서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매우 힘이 드는 상황이다.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건축에 대한 애착과 그들만의 독특한 인터넷 문화는 매우 상대하기 까다로운 건축주의 모습이다. 최근에 두 개의 프로젝트에서 건축주로부터 직접 공사감독업무까지 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내게 특별한 관리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주에 아무런 인맥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불신은 새로운 일을 만들기도 한다. 이주민들에게 제주에 믿을 수 있는 아무런 인맥이 없다는 것은 실력만으로 경쟁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요란한 심의제도가 무심할 정도로 월정리에서 우리는 실패를 맛보았다. 다시는 그들에게 건축사의 모든 권한을 내어주지는 말자. 이제 그들의 취향과 욕구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제주사회에 적절한 디자인을 만들기 위한 고민과 사유를 그들 이상으로 구체적으로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새로운 방법론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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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 Jeju
옛말에 '배는 짓고, 집은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집을 짓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희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건축설계와 관련한 정보를 최대한 제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집을 만드는데 저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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