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의 1970년 초반의 새로운 주거의 등장

1970년대 새로운 주거형태의 등장


  1. 1970년대의 서귀포

매일같이 경험하는 우리의 주거공간의 모습은 어느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의 발명에 의해서 갑자기 고안된 것이 아니다. 특히 한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색깔을 드러내는 공간이나 형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지역의 독자적인 문화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들어 1980년대를 살아온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서귀포의 주거공간에서 제삿방과 물부엌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제삿방과 물부엌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초가에서의 살림에서도 있었던 이름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러한 공간들은 초가라는 주거형식에서 새로운 주거형식으로의 전환과정에서 새로운 주거형식이 과거의 주생활을 수용하지 못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초가라는 전통적 삶을 담아왔던 주거의 형식이 새로운 주거형식으로의 변화를 겪기 시작한 배경을 들자면 일제강점기라는 1920~1940년대의 외래주거문화의 유입의 영향을 원인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1960년대의 사진을 들춰보더라도 서귀포의 전반적인 풍경은 초가의 모습이 지배적이었고 그것은 전체 제주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말하는 물부엌과 제삿방이라는 것도 오래전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1960년대를 지나 1970년이 들어서면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크게 무리가 없는 생각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겪어왔던 이러한 공간에 대해서 세밀한 사적(史的)검토를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1970년대의 집단주거지의 고찰은 서귀포의 주거사(住居史)를 살피는데 큰 의미가 있다. 이 시기 주거형식의 변화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서 새로운 기술에 의한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970년은 새마을운동이라는 전국적인 경제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 시대를 청년으로 살았던 이들에게는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새마을운동의 모토가 늘 가슴깊이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서귀포의 경우에는 1970년대 초반에 감귤농업으로 꽤 많은 부농들이 성장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기도 하였지만 잘 살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던 시기이기도 하였고 실제로 많은 변화가 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또한 1970년에는 서귀포 뒷뱅디 일대에 1호 광장을 설치하고 지금 동문로터리로 불리는 2호 광장과 서문로터리로 불리는 3호 광장을 연결하는 3각형의 주요 시내도로가 완성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도시계획도로의 완성은 솔동산을 중심으로 하던 서귀포의 경제권이 지금의 올레시장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뒷뱅디 일대로 이동하게 되면서 도시의 구조가 달라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서귀포에서는 신흥주거지를 개발하여 분양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이들이 등장하였다. 대개는 하나의 골목길을 끼어서 길 양쪽으로 주거지를 선형으로 개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7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선형주거지 두 군데를 조사하였다. 전체적으로 그 시기에 몇 군데가 누군가에 의해서 이루어졌는지를 양적인 데이타를 파악하는 것까지 조사연구를 진행하기에는 여러 가지 여건상 어려움이 있었다. 여기서는 서귀포 동지역의 건축물 대장을 검토하여 1970년대 초반에 같은 시기에 준공된 대표적인 케이스로 두 군데를 살펴봄으로써 당시의 주거환경과 주생활의변화를 살펴보려고 한다. 조사된 수량은 미미하지만 1970년대 초에 서귀포에서 진행되어진 주생활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조사대상지의 1번 지역은 서귀중앙초등학교 동측에 있는 지역이며, 2번 지역은 서귀서초등학교 동측에 위치하고 있다. 둘 다 초등학교 인근을 개발대상으로 하였고 골목길을 만들어 길에 면한 좌우로 택지를 조성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다만 1번지역의 경우는 골목의 방향을 남북으로 한 반면 2번지역의 경우는 골목의 방향을 동서방향으로 개발하였다. 두 지역 모두 당시에 문화주택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에는 나름 앞서가는 주거형태를 갖춘 집으로 인식되었다. 이하 도로명 주소를 따라서 1번 지역을 ‘중동로 집단주거지’로 명기하고 번 지역을 ‘홍중로 집단주거지’로 명기하도록 하겠다.

  1. 중동로 집단주거지 현황

서귀포 중동로에 위치한 이 지역은 폭 2.4미터의 좁은 통과도로의 형태의 골목을 하면서 양쪽으로 택지를 개발한 사례이다. 건축물대장을 확인하면 이 골목에 면해있는 7가구의 집들이 모두 1972년에 사용승인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골목의 폭이나 대문의 형태는 역시 이 당시에는 주차의 문제는 주거지계획에서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주거지가 위치한 지형은 남북으로 이어진 골목의 동쪽에 면한 필지와 서쪽에 면한 필지가 거의 1미터 이상의 높이차가 있다. 이는 원래 서측에서 동측으로 경사가 있는 지형에 건축하였던 탓에 골목을 끼고 마주하고 있는 대지가 서로 다른 지형적 상황을 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골목에서 동쪽에 면한 대지는 대문에서 마당으로 바로 진입할 수 있도록 대지를 메워서 높여서 만들었으나, 서측에 면한 대지는 4~5단 정도의 계단을 올라서야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1) 중동로 14번길 4-6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강○○(여,1951년생)씨는 1977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때문에 1972년 처음 집을 지을 때 당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다만 강씨가 아는 바로는 서귀포에서 최초로 지어진 문화주택으로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문화주택이라는 것이 특정의 유형을 말하거나 행정적으로 특별한 지원을 받아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분양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홍보차원으로 붙여진 이름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강씨가 처음에 이사 왔을 때에는 부엌 바닥이 마루보다 낮은 형태였는데 그것을 마루와 같은 높이로 높이고 벽을 터서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우측에 크고 긴 안방은 원래 두개인 방이었는데 그 전에 살던 주인이 방이 좁아서 두개를 합쳐서 하나의 큰 방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1972년 준공하였을 당시에 문화주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그 시점에서 가장 현대식이라는 의미를 표방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년도 안 되는 사이에 부엌바닥을 높이고 방을 넓히는 등의 변형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주생활 양식의 변화가 급격히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중에 온 사람이 이거 두 겐디 터부럿댄 마씸게. 이거 두 개 잖아예. 방은 있는데, 마루만. 일로 이레 늘린거. [부엌도 새로 만든거 아니 마씸?] 아니, 부엌은 그냥 그렇게 된거마씨. [이사 올 때 부엌이 낮아진 부엌 아니라수과?] 씽크대도 안놓고 예. 촌에 부엌 우리 살 때 오물락 들어간디 있지 안험니까. 경 헤난거 닮아마씨. [77년이면 연탄 안써수과?] 연탄. 연탄 써실꺼우다. [연탄아궁이 헤그네예.] 예.

강○○(여,1951년생), 190820 채록.

1977년 이사를 왔을 때는 부엌에서 연탄아궁이로 취사와 난방을 하는 구조였다고 기억한다. 그 이듬해에는 주변에 있는 집들이 2층을 올리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서 강씨네도 그때 2층으로 증축하였다. 지금 이 골목에 면한 집들은 거의 모든 집들이 이층이지만 애초에는 모두 1층집의 평지붕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평지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2층의 증축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화장실은 지금도 바깥에 별도로 있다. 화장실이 애초에 바깥에 세면장과 같이 만들어져 있는 것은 이 골목길에 면한 모든 집들이 공통적이다. 1970년대 초반에는 아무리 신식이라고 하여도 화장실을 실내에 두는 것은 기술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화장실은 수세식으로 되어 있지예? 언제쯤 고쳐수과?] 우리 이사 온 후에는 한참 되수다게. 기억 안남수다. 우리 이사 온 후에는 그냥 옌날 재래식예. 경허단에 한 일 년쯤 살단에 저거 고쳐실꺼라. 그때 한참 시작 헐 때니까. [고칠 땐 이 골목이 한꺼번에 고쳐실꺼 아니예?] 아니 경도 안허고 나중에 헌 사람도 있고. [아, 돈 생기는 대로] 예. 자기네 만씩.

강○○(여,1951년생), 190820 채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개조한 것도 2층으로 증축하였던 1978년이나 그 뒷 해 정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수세식으로 개조하였다고 해서 정화조를 설치하였다는 의미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 처음에는 냄새나는 화장실을 냄새가 나지 않는 시설로 개조한다는 의미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1970년대의 초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동안 이 집은 난방설비의 변화와 화장실의 변화 그리고 개별주거공간의 확장욕구 등이 반영되고 있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2) 중동로 14번길 4-2

이집 역시 현재는 2층으로 되어있으나 당초는 1층으로 된 주택이었다. 이 집에서는 필자 역시 1977년과 1978년에 이 집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어서 당시의 집의 모습의 기억을 되살려서 평면을 수정해 보았다.

1972년 처음 신축 하였을 때의 모습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에도 이 골목안의 집들은 다 똑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 돌아보면 공간구성에서의 특이점은 좌측편의 방 하나를 임대가 용이하게 작은 부엌을 붙여서 출입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임대를 주지 않고 전체를 주인이 사용하려고 할 때는 마루에서도 출입 가능한 문이 있었다. 지금 건축법으로 말한다면 2가구 주택인데 그 당시에는 아직 다가구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골목길을 따라 서측편의 집들은 길보다 집이 높아서 길에서 집의 구조를 살펴볼 수 없지만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 동측편의 집들을 보면 길가에 면해서 모두가 출입문이 있었던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문들은 임대를 위한 부출입구였던 것이다. 앞서 보았던 강○○씨댁의 경우에도 임대하기 위한 작은 부엌과 주인이 쓰기 위한 부엌을 합쳐서 부엌공간을 크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집에서는 주방을 넓힌 것이 아니라, 작은 주방을 화장실로 개조하였다. 우측의 두개의 방은 그 사이를 네짝 미서기문으로 칸을 나누어 사용하였는데, 필요에 따라 공간을 크게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일본의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그러한 공간사용의 영향을 받아들인 태도가 아니었나 여겨진다. 이렇게 방과 방 사이에 미서기문을 설치하여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도록 한 주택의 평면은 60년대의 슬레이트집의 평면에서도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두개의 방 사이에 있었던 미서기문을 없애고 벽을 쌓아서 방을 완전히 분리하였다. 미서기문을 달아서 폐쇄와 개방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공간활용에 합리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이러한 공간은 결국은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없는 불편함이 있다. 이러한 공간변화역시 점차 사회의 변화가 개인의 사생활보호가 중요하게 인식되면서 가족 간에도 공간구획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더 장점이 있다고 판단한 결과일 것이다.

이 집 역시 1978년까지는 정지가 마루보다 50센티 정도가 아래로 내려가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정지바닥을 실내보다 낮게 만드는 것은 아궁이를 이용한 연탄난방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소위 곤로라고 하는 석유를 이용한 취사도구가 등장하는 시기였으며 연탄은 취사를 위한 연료이기 보다는 주로 겨울에 난방을 위한 연료로 애용되었다.

1977년 필자가 거주할 당시 이 골목 안에서 이 집에서는 특이하게 마당에 연못이 있는 화단이 조성되어있었다. 연못에는 수도를 틀면 분수처럼 물이 솟아오르게 되어있었다. 아마도 문화주택으로 지었다는 이 골목길에서 첫 번째 집이어서 홍보를 위한 시설 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화장실이 실내로 들어오고 뒤쪽에 있던 안방을 앞으로 오게 하는 것은 역시 시대가 변하면서 주거공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정지 바닥을 높이고 거실과 하나의 공간으로 개방되게 한 것 역시 주거공간에 대한 의식변화를 반영한다. 방은 개인공간으로 더욱 폐쇄성을 강조하고 거실과 주방은 공적공간으로 점차 개방적은 공간을 지향하게 된다.

이집 역시 이층으로 증축 하였을 뿐 아니라, 마당에 별채로 자식부부를 위한 살림집을 조성하였다. 집을 붙여서 크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필지 안에서 별채로 자식부부의 살림집을 조성한다는 것은 안밖거리의 전통적 삶의 방식과도 같은 것이다. 건축공간을 구성하는 기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삶의 패턴이라는 것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3) 중동로 14번길 4-5

길○○씨댁은 골목길에서 서측에 면한 집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골목에서 서측에 면한 집들은 대지가 길보다 1미터가량 높기 때문에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마당으로 이를 수 있고, 때문에 길에서 집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 남측의 마당을 거쳐서 남측의 현관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동측에 있는 집과 다르지 않다.

얼핏 보면 길 동측에 있는 집들과 평면이 좌우가 바뀌었을 뿐 비슷한 구조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측의 안방과 그 뒤로 아궁이와 벽장이 있었던 흔적은 다른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정지안쪽으로 세면장이 있었다는 기억은 그것이 애초에 있었던 것인지 개조한 평면이었는지를 알 수는 없으나 기능적으로 편이성을 추구한 평면으로 보인다.

특이한 점은 좌측의 방안에 화장실이 있다는 점인데, 원래는 실내에 있는 그 화장실이 임대인이 사용하는 작은 부엌 이었다고 하며 그 방 하나는 부엌을 통해서 따로 출입 할 수 있는 임대를 줄 수 있는 방이었다. 이 집 역시 임대를 고려한 두 가구 살림집인 것이다.

 

[여기는 집이 갈랑 빌려주거나 영 되 잇진 않아낫지? 부엌이 하나 더 잇거나 그러진 않아낫지?] 부엌이 하나 더 잇진 않고 예. 저기 기억에. 여기 이쪽 방에. 아주 어렷을 때 처음 기억에 잠깐 일이년인가 신혼부부가 살앗던 거 같애. 아주 옛날에. [그러면 그 사람들은 식사를 어떵 헤서?] 게난 제 생각에는 여기 나중에 욕실로 헷는데. 여기가 약식 부엌이 있었던 것 같애.

길○○(남,1968년생), 20191020 채록.

임대가구를 구성하는 태도에 있어서의 특이점은 임대자가 주거공간의 거실을 가로질러 출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임대를 위한 공간을 길가 쪽으로 두지 않고 집안 깊숙한 곳에 두었다는 점이다. 평면은 길의 동측에 있는 주택과 좌우가 바뀐 것처럼 보이나, 임대자의 공간의 위치는 길과는 관련 없이 여전히 같은 곳에 있는 것이다.

길○○씨는 어린 시절 부터 줄곧 이집에서 살았으나, 1968년생인 그가 처음의 건축당시의 모습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초기에 이 집을 건축한 관계자의 증언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는 이러한 이유에 대한 간단한 해석을 해야만 할 것이다. 평면은 서로 좌우가 바뀐 상태로 보이나 그것은 형태적인 것일 뿐 실제 사용하는 공간을 보면 안방은 동쪽으로 임대자의 방은 서쪽으로 놓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주거공간에서의 실의 위치가 길과 진입부의 방향에 영향을 받기 보다는 방위를 더 중시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반면에 옥외 화장실의 위치는 동측에 면한 집들은 동측에 위치한 반면 길○○씨댁의 경우에는 서측으로 배치하였다. 푸세식 화장실을 만들었던 초기의 도시주거의 경우에는 화장실이 대문과 붙여서 길가에 면해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화장실의 분뇨를 수거차량에서 퍼내기가 쉽기 때문에 합리적인 이유가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대문의 위치와는 아주 반대쪽에 깊숙한 곳에 옥외화장실을 두었다. 이는 입구에서 화장실을 멀리 두는 전통적인 배치관습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초기의 문화주택이라는 신식의 주거양식에서도 이러한 관습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1. 홍중로 지역 집단 주거지개발

일호광장의 북쪽에 면한 서홍동 지역은 1970년대의 도시계획도로가 완료되면서 새로운 주거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사대상지역 역시 1972년에 동시에 준공이 이루어진 집단주거지이며 15개정도의 필지가 폭 2.8미터의 골목에 면해서 들어서 있다. 현 거주자의 증언에 의하면 초기에 건설될 당시에 살기 시작한 사람으로는 이 골목 안에 없다고 하며 대부분 임대하여 살고 있다고 하였다. 홍중로의 조사대상지의 바로 남측에 면 하여는 하나의 골목을 끼고 2층으로 구성된 또 다른 집단주거지가 있었는데, 건축물대장을 확인해보니 이 역시도 1983년에 동시에 준공된 집단주거지였다. 대략 10년을 사이에 두고 두개의 집단주거지가 연접해 있다는 점 만 으로도 주거건축을 통한 시대변화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한다.

1) 홍중로 21번길 14

지금 살고 있는 유○○씨의 경우도 1997년부터 임대하여 살고 있어서, 이집의 건축당시의 원 모습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다만 그때의 기억으로 서귀포에서 택시기사에게 문화주택을 가자고 하면 쉽게 찾을 정도로 당시에는 꽤 잘 사는 집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했다.

[여기를 사람들이 부를때는 그냥 문화주택 하면..] 문화주택. [서홍동 문화주택 하면 알아마씨?] [이○○:아니, 택시기사들도 오래 나이드신 분들은 문화주택 가게 마씸 하면 알아먹는데 젊은 분들은 잘 몰라예. 거난 신라타운 밑에 가게마씨하면 아는데, 그냥 문화주택은 잘 몰라예.] [나이든 사람은 문화주택하면 알아마씨?] [이○○: 알아마씨.] [그러면 서홍동 근처에 문화주택하면 여기?] 여기 뿐이우다. 이 서귀포 시내 안에는 여기뿐이 어수다. 문화주택.

유○○(여,1948년생), 이○○(여,1972년생), 20191105 채록.

지금의 모습을 보면 대대적인 리모델링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중동로의 집단주거지의 경우 1978년경에 대부분 2층으로 증축하였는데 그와는 대조적이었다. 다만 천정에 보이는 수벽이 예전에 있었던 공간이 변형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유○○씨는 그것을 가리키면서 마루의 뒤편으로 작은 방이 있었고, 부엌이 옆에 안방 뒤에 시설되어 있어서 방이 네 개가 있는 집이었다고 하였다.

역시 이집에서도 물부엌과 같은 부엌에 딸린 허드레 공간을 따로 만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서측 편으로는 화단이 아닌 텃밭이 있었는데 예전의 부엌의 위치와 인접해서 우영을 만들었던 전통적 삶의 태도가 남아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외부의 화장실은 짜투리 공간을 활용하려고 한 것처럼 매우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외부화장실을 같이 만들면서 계단아래공간을 활용하다보니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중간 참에는 물통으로 사용한 것 같은 폐쇄된 구조물이 있었는데, 지금 유○○씨도 이 통의 용도를 알지 못하였다. 짐작하건데 화장실 위쪽에 만들어진 이 구조물은 화장실를 수세식으로 만들면서 수압을 이용한 세척용으로 이용하기 위한 물탱크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확실치 않다.

중동로의 집단주거지에서는 임대용 방을 두고 분리과 결합을 고민하고 두개의 방 사이에 미서기문을 두어서 공간을 어떻게 분리와 결합을 시킬까하는 변용에 고민을 한 흔적이 있었다. 반면에 이 집에서는 임대를 고민한 흔적도 없을 뿐 아니라 방의 숫자도 4개나 되고 방과 방 사이에 미서기문을 달지도 않는 등 공간구성에 있어서 매우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이 일대의 집들도 중동로에 있는 집단주거지와도 동일한시기인 1972년에 준공이 된 집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개념적 차이는 매우 특이하게 여겨진다.

같은 시기에 이렇게 다른 개념의 평면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그것을 지어서 분양하려는 이의 전략적인 의도가 있었겠지만 이러한 공간구성의 차별 역시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이러한 주택에 누가 입주를 하고 매입을 하였는지 또 누가 시공과 기획을 하였는지까지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현재의 조사연구가 그 단계에 미치지 못한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만 동시대에 이루어진 이러한 다른 성격의 평면은 그 당시의 사회계층의 의식이나 자본 축적의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였다는 점은 생각해 볼 수 있다. 대개 비슷한 정도의 평면구성을 갖는 혈연중심의 전통적 사회에서 집단화된 주거공간의 등장은 자본적 성격이 비슷한 사회계층으로 구성된 공동체와 같은 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홍중로 17번길 4

이 집이 있는 서홍동의 골목 역시 1983년에 일단의 단지처럼 조성되어 사용승인 된 집단 주거지역이다. 앞에서 살펴본 1972년 준공된 집단주거지 역시 진입을 위한 골목길이 여전히 대지로 남아있는데 이곳 역시 공유되어진 골목이 여전히 대지로 되어있어서 골목에 면한 모든 집들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맹지인 셈이다. 다행히 1972년 지어진 집단주거지와는 달리 골목이 꽤 넓게 조성되어있어서 처음에는 고려하지 못했던 주차공간을 골목을 이용해서 할 수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10년 전에 지어진 문화주택단지 역시 그 당시의 서귀포의 주생활의 변화와 경제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지표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이 골목에 일단의 단지로 조성된 주택들도 1980년대 초반의 서귀포의 주생활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1972년에 지어진 두개의 문화주택단지에서의 건축평면은 두 곳의 단지가 서로 다른 개념으로 지어졌다고 하였으나 각각의 단지에서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패턴의 평면이 주를 이루어서 하나의 유형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곳에는 대개 2층의 주택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규모의 측면에서만 비슷할 뿐 모두가 다른 디자인과 다른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일련의 단지가 조성되었음에도 각 집마다 서로 다른 형태의 주거공간이 만들어진 것 역시 그 자체가 또한 집에대한 사회인식의 변화가 10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생겨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사대상 주택의 주인인 김○○씨(남,1948년생)의 경우에는 다행히도 처음 이집을 설계하고 지을 때 부터 관여하여서 초기의 모습과 중간에 달라진 과정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개발 당시에는 서귀포에서 꽤 부유한 단지로 생각되었다고 하였다. 토지를 매입하고 분할하고 옆집과의 사이 담장을 하는 것까지는 초기에 주택단지를 기획한 사람이 하였고 전면의 담장과 나머지의 건축과 관련된 모든 것은 각자 그 토지를 분양받은 개인이 진행하였다.

외관상으로 보아 지금의 시점으로 보아도 꽤 그럴듯하게 보이는 주택들의 공사를 대부분 주인들이 직접 직영으로 지었다고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지금의 시각으로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또한 서로 다른 평면과 외관을 하고 있음에도 이 주택단지의 모든 집들의 설계를 작고하신 이세환건축사가 혼자서 설계하였다는 점도 놀라운 일이다. 최근의 타운하우스라고 하는 방식으로 일련의 주거단지를 조성하는 방식은 대부분 동일한 평면과 구조를 시행사와 건축사가 의논하여 만들고 그것을 홍보하여 주인을 찾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것과 비교한다면 이 주택단지에서 추진하였던 방식은 개별필지를 분할하여 각자의 주인에게 설계와 시공을 진행하게 하였던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전체적인 구상과 개별적인 설계를 서로 다른 영역으로 분리하여 추진하는 방식으로 계획의 측면에서는 조금 진일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주택이라고 하여도 2층 정도 되면 시공을 하는데 꽤 전문성이 요할 것 같은데, 공사를 어떻게 비 전문인인 개인들이 직영으로 할 수 있었을까? 처음에는 필자도 그 점이 궁금하기는 하였는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모든 분야가 전문화되어버린 지금의 시점이 오히려 개인의 능력을 약화시킨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거 전통사회를 거친 어른들은 집을 짓는 것이 그렇게 어렵거나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 돌을 나른 경험도 흙을 발라본 경험도 있는 그 당시의 어른들은 몰탈을 비벼서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벽돌을 쌓고 미장을 하는 것이 각 분야의 기능공을 불러서 일을 시킨다고 하여도 그 물성을 이해하고 집을 짓도록 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직영으로 직접 지었습니다.[그러면 다른분들도 직영으로 지으신분들이 많이 이신가마씨?] 여기 이 골목안에 전부 직영으로 지었어요. … 재료 모찌. 대마 이런식으로.. [설계는 누가했는지 혹시?] 이세환 건축사가 했어요. 여기 열 개는 그분이 했어요. 한꺼번에 설계가 나왔어요. [그래도 집들은 도면이 다 틀리지예? 제각각]그렇죠. 구조는 다 다르죠.

 

[원래 설계 할 때는 이게 안방이라 하고, 저 방은 무슨 방 마씨?] [부인: 손님방] [손님방으로 해도 아들이 쓰고 예. 아들이 어리난.] 이층에 딸들 쓰고. [그러면 가운데 방은?] [부인: 이건 창고방. 방이 조그만 거 이서신디예. 젯상 같은 거 놓고.] [방 이름은 따로 없고?] [부인:골방] [부인: 우리 앞집에 분은 식모방이렌 헙디다마는..] [그때 서귀포에 진짜 식모방이 이서수과?] 예. 앞집에 식모도 있었고, 식모방도 있었어요. [부인: 우리 집 짓을 때 와보고 골방 골방 하니까. 아이고 식모방하면 딱 좋겠네 하더라고요.]

김○○(남,1948), 20190917 채록.

공간구성의 내용을 보면 당시의 설계의 특이성이 보이는데 주인의 설명을 통하여 확인한 공간구성으로 안방에 잠을 자기위한 침실이 따로 있고, 그 침실을 통해서 화장실이 있는 공간구성이었다. 거실과 같은 안방과 침대가 있는 잠을 자기위한 침실을 따로 구성하였다는 것인데 일반적인 공간구성의 방법은 아니었다. 이러한 공간구성은 어떤 의식을 반영하는 것일까? 이 역시 필자는 사회변화의 하나의 과정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아니었는가 생각을 해 본다.

전통적 사회에서 안방은 잠을 자기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이부자리를 벽장으로 개어놓으면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침대를 설치하는 순간부터는 안방은 그야말로 침실일뿐 손님을 들이기는 어려운 공간이 된다. 침대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우리의 거실은 점차 손님맞이를 위하여 커져가기 시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안방에서 침실을 분리하려는 생각은 아마도 이러한 주생활의 변화 속에서 그 두 가지의 고민을 만족하기 위한 공간구조로 이세환건축사가 고안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면서도 한 집에서 두개의 화장실을 두는 것으로까지 공간구성이 확장되지는 않았다. 하나의 화장실을 두고 한쪽 문으로는 침실로 연결되고 다른 문으로는 거실로 연결되는 두개의 문을 두고 있었다. 애초에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실내계단이 있어서 이층은 주로 자녀들이 사용하고 일층에는 부부가 사용하였으나 자녀들이 성장해서 출가하고 이층을 사용할 일이 적어지자 내부계단을 없애고 일층과 이층을 분리하였다고 하였다. 여주인의 입장에서는 애초에 부엌이 앞으로 설계되었으면 하였으나 설계는 부엌이 뒤편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여전히 아쉽다고 하였다. 김○○씨는 애초에 집을 설계할 당시에 물부엌, 제삿방 등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그 당시 본인의 나이가 어려서 그 필요성을 잘 몰랐다고 말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기본적인 골조는 조적조건물이며 벽체단열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바닥난방을할 때도 단열재를 깔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방습을 생각했는지 보일러호스 아래로 루핑을 깔았다고 했다. 주방은 애초부터 입식으로 시설하였고, 지금의 씽크대가 교체되기는 했어도 기본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보일러를 연탄과 기름을 겸용으로 하였으며 거실은 난방하지 않았다. 이 역시도 전통 초가에서 구들은 난방을 하고 정지와 마루는 난방을 하지 않았던 삶의 방식이 이어져온 과정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1980년대에는 주택뿐 아니라 공동주택에서도 거실에 난방을 하지 않은 사례는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초반의 주택에서는 건축설계라는 과정이 집을 짓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개별 주인들의 의지에 의해서 자기만의 요구를 반영한 집이 지어지도록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각자 다른 평면과 공간구성이 등장하고 무언가 건축사에게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은 공간의 구성과 설계에 소유자의 의지가 적극적으로 개입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1. 1970년대 초반의 서귀포 집의 변화를 생각하며

서귀포 동(洞)지역에 지어진 두 군데의 문화주택이라고 하는 것은 1970년 초반에 이루어진 주택사업의 형태였다. 문화주택이라는 이름은 서울에서는 1960대에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을 분양하기 위한 홍보용으로 만들어낸 이름이었다. 일시적이지만 1970년대 초반에 서귀포에서도 이러한 이름이 주택지를 홍보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또한 그 집들이 새로운 주거유형을 표방하고 있다는 의미도 갖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의 서귀포에서 선호된 신흥주택지의 개발 방식은 골목길을 끼어서 길의 양쪽으로 택지를 만들어가는 길 중심의 선형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신흥주택에서도 1970년 초반에는 화장실과 욕실을 실내에 설치하는 것이 어려웠다. 또한 난방은 연탄아궁이로 취사와 난방을 겸하는 방식이었고 거실은 난방을 하지 않아서 전면에서 보면 집의 양쪽으로 굴뚝이 올라오기도 하였다. 굴뚝을 기중삼아 전면에 깊은 처마를 만드는 것은 제주도에서는 널리 볼 수 있는 근대식주거의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거평면의 유형은 소유계층에 따라 형식이 다양해지기 시작한 단계로 여겨진다. 중동로에 지어진 신흥주택지에 있는 단독주택들은 방을 세 개를 만들면서도 임대와 가변성을 고려한 평면으로 융통성에 집중하여 계획되었다. 반면 같은 시기에 홍중로에 지어진 신흥주택지는 미서기문을 이용하여 두개의 방을 연결하는 방식도 없거니와 작은 방을 포함해서 네 개의 방을 가진 공간분화에 집중한 평면으로 구성되었다. 같은 시기에 이렇게 다른 개념의 평면구성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사회계층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반영하기도 한다.

또한 현관부분을 만드는 태도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아직 독립된 현관을 만들지는 못하였지만 중동로의 집의 경우에는 마루전면을 모두 현관으로 사용하지 않고 일부는 창으로 하고 일부만을 신발을 벗는 진입공간으로 다루고 있다. 반면 홍중로의 집의 경우에는 마루폭만큼의 미서기문을 달고 마치 초가의 낭간에서와 같이 전면을 현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의 차이도 주거공간의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정리해본다면 홍중로의 경우에는 과거 초가의 평면유형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려고 하였다고 한다면 중동로의 경우에는 변화하는 사회현상에 맞추어서 변형된 공간구성을 만들려는 고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동로와 홍중로에서 보이는 공간구성의 공통적인 특징은 3칸의 겹집의 초가의 구성에 대한 사고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이다. 가구식구조에서 조적식구조로 변하면서 공간구성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었음에도 집을 전면 3칸과 측면 2칸으로 분할하여 공간구성 하는 것을 기본적인 골격으로 삼고 있다. 이는 조적조의 건축을 하면서도 공간에 대한 과거의 유형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198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신흥 집단주거지에서도 골목을 만들어서 길 양쪽으로 주택을 짓는 방식은 똑 같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가 들어서면 동일한 평면의 공간구성으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요구에 의해서 서로 다른 공간구성을 채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개발의 방향이 바뀌어졌다. 평면의 구성도 70년대와는 달리 매우 독특하고 자유로운 구성을 하고 있음을 할 수 있다. 게다가 똑같은 날에 준공하여야 하는 택지개발임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공사 진행이 가능하였던 것도 이 시기의 건축적인 특징으로 짚어볼 수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제주도에서 집합주거지의 개발의 초기단계의 모습과 그 발전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쉽게도 아직 남아있는 건축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획하고 개발을 추지하였던 주체를 확인할 수 없어서 구체적인 의도와 개발방식에 까지 그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2010년대 후반인 지금에 제주도 전역에 유행하고 있는 타운하우스라는 방식은 실상 1970년대에 이루어진 문화주택이라는 방식에서 그 주거사의 줄거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타운하우스라는 집단 주거지의 개발방식은 이미 과거의 낡은 건축이라고 여길 수 있는 1970년대의 개발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차원에서 1970년대와 더불어 1980년대에 이루어진 집단주거지의 개발방식을 같이 비교해보면서 주거사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은 그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2019년, 서귀포건축포럼에서 발표한 원고
#양성필, #건축사사무소아키제주, #제주건축, #서귀포 근대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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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 Jeju
옛말에 '배는 짓고, 집은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집을 짓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희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건축설계와 관련한 정보를 최대한 제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집을 만드는데 저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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