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도시읽기

서귀포도시읽기
서귀포마을의 공간구성변화

  1. 도시읽기

도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람들은 실제의 복잡한 도시를 몇 가지의 단순하고 인상적인 이미지를 중심으로 기억하고 구성하게 된다. 그게 실재하는 도시와 읽혀진 도시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잘 읽혀지는 도시라면 어떤 도시일까? 그것은 길을 안내하거나 찾을 때 그리 큰 고민이 없이 가능할 때 잘 읽혀지는 도시하고 말을 한다.

그런 면에서 제주도의 마을들은 기본적으로 매우 잘 읽힐 수 있는 선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한라산과 바다의 존재이다. 누구나 제주도를 그려보라고 하면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는 것은 강력하고 절대 우위에 있는 한라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는 제주도의 형상이다. 케빈린치가 도시 이미지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요소 중에서 랜드마크(Landmark)와 엣지(Edge)라는 두가지의 요소가 제주도의 모든 마을에는 이미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케빈린치가 이야기한 다섯 가지 요소 중에 나머지는 결절점(node). 길(Path).영역(District)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의 요소들은 가로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도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로망을 읽는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서귀포 옛마을의 가로망을 살펴봄으로써 서귀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성격과 특성을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특히 최초의 지적도라고 할 수 있는 1914년 지적도에서부터, 중요한 가로체계의 변화를 읽을 수 시점을 중심으로 서귀포 옛마을의 공간구조가 어떻게 변하여 왔는지를 생각해보는 것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지도와 사진만을 통해서 구성하는 도시의 변화라는 것이 세세한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이는 큰 구성에서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세세한 삶의 모습을 읽어나가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부족한 경험에 의해서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는 약간의 추론을 더해 보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차후 보완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1. 1914년 지도를 통한 공간구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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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진은 본래 홍로내(홍로천)위에 있었는데, 제주목사 이옥에 의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졋다. 이는 이옥의 재임기간인 선조22년에서 선조25년 사이(1589~1592)의 일로 여겨진다. 1702년 이형상목사의 지시에 의해 제작된 탐라순력도중 한라장촉에서의 서귀포의 모습을 보면 ‘서귀’위에는 ‘구서귀’가 표시되어있다. 이는 이 당시에 제작된 탐라삼현도와 여지도의 제주목 지도에서도 동일하게 표기하고 있다. 이는 서귀라는 마을이 서귀진의 이동과 더불어 같이 옮겨졌다는 의미로 보아도 될 것이다. 또한 서귀라는 마을이 본래 해안에 면한 어촌마을이 아니었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서귀진성과 더불어 형성된 서귀라는 마을은 지금처럼 말하자면 1600년경에 형성된 신도시와 같은 마을인 것이다.

그러면 서귀진이 이전되기 전에 서귀포해안에는 마을이 없었던 것일까? 도시를 읽기위한 좀 더 분명한 자료인 지적원도를 살펴보면서 서귀포의 공간구조를 읽어보자. 지적원도는 일본인에 의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에 의해 작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적도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의 지적원도는 1914년데 작성된 것이다. 지적도는 토지의 경계를 확정해서 토지 소유를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양에서 조차도 조선시대에서는 토지에 대한 개인소유가 인정되지 않았었다. 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이 신고를 하면 관청에서는 빈 땅을 분양하거나 대여해주는 방식으로 지상권만 인정하였다. 일본인들은 가옥을 매입하고 나서 거기에 부속된 토지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함으로써 토지를 사유화하기 시작했다. 지적도를 만드는 것은 이러한 사유화되지 않았던 토지를 사유화하기 위한 기초적인 조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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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특성을 이해하고 지적원도를 보면 당시의 현황을 대략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적에는 지목이라는 것이 있는데, 농지의 경우에는 전이나 답이라고 씌여 있고, 집이 지어진 땅에는 대지라는 의미로 대라고 씌여 있다. 이러한 방식은 현재에도 유효한 방식이다.

일단 대지가 몰려있는 지역이 당시에 마을이 형성되어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로 1번과 2번에 대지가 집중되어있다. 왜 두 개의 마을로 분리되어있을까? 제주에는 하나의 마을이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에는 보통 웃동네와 알동네라는 이름으로 흔히 부르게 된다. 그러한 개념으로 두 개의 마을로 분리되어 있는 것일까? 하지만 서귀포는 윗동네와 알동네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이는 하나의 영역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서귀포 본향당은 지금 이중섭거리인 알자리동산에 있고 솔동산의 아래에 있는 서귀포 마을과는 거리감이 없지 않다. 또한 서귀포 본향당 본풀이의 내용을 보면 동홍과 서홍이 서로 갈라선 유래에 대해서 본을 풀고 있지 서귀포 해안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서귀포라는 마을이 이 지역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의미이다.

반면 서귀포에는 안개성창의 바로 옆에는 할망당이 있는데 어촌마을에서 포구와 당이 같이 붙어있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이는 서귀포 해안마을이 어촌마을로 입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만 그 규모면에서는 그리 큰 마을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광민은 포구이름의 연구에서 서귀포의 성창의 이름을 안개성창이라고 소개하면서 이는 밖개성창을 염두에 둔 이름일 것으로 설명하였다. 1950년대의 사진을 보면 할망당의 바깥쪽 절벽 아래에 작은 성창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밖개 성창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여기가 아니었겠는가 생각된다.

지적원도를 얼핏 보기에는 2번 지역은 해안에 면한 어촌마을로 보이고, 1번 지역은 해안마을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번지역과 2번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ㅅ’자 형태의 가로의 형태를 보면 이는 분명 새로이 계획되어 만들어진 근대식 도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새로운 가로망은 왜 만들었을까?

1번지역의 지리적 성격을 보면 서귀진성과 안개성창의 사이에 위치한다. 1번 지역의 위치를 보면 성창과 가깝다고는 하여도 성창과는 지형적인 높이차가 있어서 어촌마을로서는 적합한 위치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의 어촌마을의 입지를 보면 법환이나 보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바다에 여가 많고 해안의 경사가 급하지 않은 지형이다. 그런데 1번지역에 마을이 형성된 이유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그대로일 것이다. 서귀포는 원래 어촌마을이 아니라 중산간마을이 진성의 위치이동과 더불어 같이 내려온 것으로 이해된다.

2번지역은 서귀포가 내려오기 이전부터 있었던 어촌마을이 작게나마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2번 지역이 커지게 된 것은 일본인들이 선호했던 해안경관이 아름다운 곳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1948년 위성사진을 보아도 2번 지역에는 별로 집들이 보이지 않는다. 소위 솔동산 아래로 신작로는 만들었지만 집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두 개의 여관인 서귀여관과 정방여관이 2번 지역에 있었다는 점을 보아서 일본인들에게서 선호된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신작로를 개설하기도 하였지만 새섬을 이용하여 서귀포를 적극적인 항구로 만들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37년에는 새섬과 인근 지역을 잇는 측량을 하고 방파제를 축조하였다. 소위 고래공장이 이 곳에 지어진 것도 그 이후의 일일 것으로 여겨진다. 고래공장은 포경선의 입출항은 물론 일본과의 연락선의 개통됨을 의미한다. 고기잡이배를 정박하는 성창이 아니라 일본과의 교역선과 여객선을 운항 할 수 있는 항구로서의 입지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서귀포의 도시조직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능하다면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주요 시설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도시조직의 입장에서 분석하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차후에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원로들의 증언 및 자료를 토대로 확인하고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1914년 지적원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서귀포의 독특한 지형은 3번 지역에서 볼 수 있다. 3번지역의 지목을 확인하면 타 지역의 주거지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구(溝)라는 지목을 볼 수 있다. 이는 한자로는 하수관을 의미한다. 실제로 제주시의 지적원도에는 목관아지로부터 해안으로 연결되는 구(溝)가 보이는데 이는 목관아지에 있었던 일제의 관공서에서 배출되는 하수관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서귀포지적에서 보이는 구거는 하수관로가 아니라 그 반대로 물이 공급되는 급수관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정모시에서 용출되는 물을 서귀진성으로 끌어들인 물길의 모습이다.

지적도를 보면 구거와 도로의 경계가 불분명한 곳이 여럿 보인다. 이는 수로가 흐르는 곳은 길이 같이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실제로 수로가 지나간 자리는 지금 서귀포초등학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길이 형성되어있다. 동서방향으로 흐른 메인 수로에서 남북방향으로 가지 쳐서 수로를 만들었는데 그 간격이 매우 일정하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수로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탐라지초본의 기록에 의하면 ‘성 밖에는 논이 많은데, 정방연의 상류를 끌어다가 물을 대었으므로 옥토라고 불리었다. 동쪽성에는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다가 우물을 만들었고, 나머지 갈래는 속에 둔 구멍으로 흘러나가 성 남쪽의 밭에 물을 대었다. 당초에 설치할 때에는 의견이 매우 많았으나 농민들은 눈앞의 이익을 탐내어 다시 수로를 뚫었다. 성안의 우물은 가뭄이 들면 마르므로 한탄스럽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이 구거(溝渠)가 계획에 의한 수로(水路)이며, 이 수로를 이용해서 논농사를 지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성안에 우물을 만든 시기가 이옥목사가 성을 이전하면서 만들었다고 하므로 이 수로의 계획도 1600년경에는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1. 강점기이후 서귀포의 성장

 

서귀포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처럼 치밀하게 계획하였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서귀진성과 마을 그리고 성창과 농경지가 동서의 방향으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귀진성의 남쪽해안이 적극적으로 계획되고 도시화된 것은 일제강점기를 통한 근대화과정에 의해 덧씌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서귀포의 도시의 성장은 서귀포항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1965년까지는 기존 솔동산을 중심으로 가로망이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까지 서귀포마을의 중심가로는 솔동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서귀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길은 포구를 향해 지금처럼 일직선으로 뻗어있는 것이 아니라 활처럼 휘어서 서귀포 밖개를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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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가지의 도시계획이 입안이 된 것은 1965년의 일이다. 1968년처럼 서귀초등학교 앞 가로가 확장이되고 바다방향으로 직선화된 것은 도시계획에 의한 결과이다. 이 당시의 계획은 서귀포항을 어촌의 포구가 아니라 물류항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이때부터의 계획은 솔동산이 서귀포의 중심이 아니라 서귀초등학교앞길인 지금의 ‘부두로’길이 서귀포의 중심가로로 여겨지게 된다. 또한 태평로를 중심으로 이해되었던 서귀포의 가로는 중정로와 동서문로를 기준으로 도시의 중심이 옮겨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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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는 서귀포의 동쪽 논밭이 있던 지역이 택지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집들도 들어서면서 일시적으로는 동쪽지역이 활발하게 개발될 것으로 기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귀포의 중심은 이미 해안지역이 아니었다. 주거지가 들어서는 것 이상의 적극적인 개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뒤늦게 해안도로를 개설하고 수변공간에 대한 계획을 시도하였으나 서귀포의 수변공간은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한 건 아닐까.

 

  1. 서귀포의 고민

 

짧은 에세이지만 서귀포의 도시공간과 성장을 읽어가면서 현재 서귀포의 도시공간의 문제를 생각해본다. 과거 서귀포마을의 공간은 명확한 의미의 도시계획은 아니었지만, 성창과 마을과 진성과 농경지라는 공간적 인지지도(認知地圖)가 명확하였다. 강점기에는 새섬이 방파제의 역할을 해서 천혜의 포구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에 의해서 새섬을 잇는 방파제를 만들어서 규모가 큰 포구의 모습을 갖추기도 하였다.

태평로 아래 서귀포의 옛 마을은 천혜적인 자연조건과 경관을 가지고 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해양도시로의 성장을 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자원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 또한 떨쳐버릴 수 없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서귀포는 두 가지의 도시 경관의 핵심인 랜드마크와 엣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분명한 영역감도 가지고 있는 훌륭한 도시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장소로 각인시켜줄 좋은 가로망과 좋은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조금 더 관찰하고 조금 더 고민해서 지금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간다면 해양도시 서귀포가 다시 드러날 날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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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사무소 아키제주 / Archijeju Architects / Jeju Architectu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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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 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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