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에 고인 물도 떠 먹었수다.

(난산리와 물의 생활사)

빌레에 고인 물도 떠 먹었수다.

1. 머리말

01난산리지도
난산리 마을지도

물은 식수라는 의미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에게는 필수적인 생존 요소이기도 하면서, 인간에게 있어서는 많은 문화적인 산물을 만들기 위한 근본적인 소재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때문에 설촌의 역사가 깊은 마을을 돌아보면, 늘 식수를 구할 수 있는 장소와 마을 공간구조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마련이다. 때문에 예로부터 한국사회에서는 우물가는 중요한 마을의 공공장소로서의 역할을 하여왔다.

우물이라는 것은 통상 지하에 있는 물을 끌어내기 위해서 땅을 파서 솟아나는 물을 가두어서 식수나 생활용수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대개 제주에서는 해안변으로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용천수들이 많아서 인위적으로 우물을 파서 식수를 공급하는 형태는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우물의 형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전에 가파도와 추자도, 그리고 하가리에서 보았던 제각기 다른 형태의 우물 혹은 물통을 보면서 식수를 공급하는 방식을 쉽게 일반화하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다.

01가파도해녀회장댁
가파도 개인물통

03하가리동지샘이
하가리 동지샘이 용천수

04추자도공동우물
추자도 공동우물

일전에 답사하여보았던 세 지역의 우물의 인상을 돌이켜보면, 제각기 다른 형태와 사용방식을 하고 있었다. 가파도의 경우에는 우물의 지름은 약 1.2미터 정도의 좁고 깊은 형태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치가 개인 마당의 구석에 만들어서 극히 개인 소유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반면 추자도에서는 마을에서 우물이 주요도로의 옆에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하기는 하지만, 제각기 두레박을 집에 두고 들고 다닌다는 측면에서 공동의 소유와 개인의 소유를 구분하는 모습도 보았다. 하가리에서는 우물을 깊게 파는 것이 아니라, 용천수의 주위를 돌로 둘러 가두어 널찍한 연못과 같은 형태를 주로 하고 있었으며, 가축을 먹이는 물과 사람이 먹는 물을 구분하여 이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제각기 형태는 다르지만, 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듯 하다. 제주의 마을이 대개 해안으로 많이 발달한 것도 수산업활동을 하는 어촌마을의 특성상 그런 것도 있지만, 제주의 용천수들이 해안에서 많이 솟아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맑은 물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기본적인 생존의 조건이기도 하며, 문명을 만들어내는 기본적인 요건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물이 없이는 어떠한 문명화된 삶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통상 마을을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으로는 물을 얻기 쉬워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이다. 때문에 난산리에 용천수가 없다는 것이 매우 특이한 점이라고 아니 할 수 가 없다.

난산리의 지명에는 많은 물 이름이 있다. 하지만 식수로 이용하였다는 조선물, 몬저리물, 아부물, 문세기물, 앞새물, 동물과 같은 이름들이 용천수가 아닌 봉천수이다. 예외적으로 조개물이 용천수라고 하는데, 그 물의 양이라는 것이 면담을 통해 들어보면 이름이 의미하듯이 겨우 한 컵으로 뜰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하니, 마을사람들의 일상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난산리지에도 잘 나와있다. 이렇게 난산리 마을에서는 물을 얻기가 쉽지가 않았다. 기본적으로 용천수가 없었던 탓에 항으로 물을 얻었던 방식이 매집마다 보편적인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난산리라는 마을이 형성되고 그 공동체사회가 유지 되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귀한 물

난산리에서 주민들에게 샘솟는 물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보면 대개 조개물을 언급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인지하고 있는 나름 이름 있는 샘물이기는 하지만, 그 물의 고여 있는 물의 양이라고하는 것은 거의 한 컵 정도의 분량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 한 컵에 불과한 물이지만, 아무리 떠도 줄지 않는다고 하여서 마을사람들이 익히 그 존재를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조개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 했더니, 그곳에서 물을 떠 마신 적이 오래되어서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그 조개물이라는 곳이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있어서, 접근이 어렵다고 하였다. 그 외에 난산리 지도에 표기된 물들은 대개 봉천수에 불과하며 또한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난산리에서 식수공급의 문제가 일상생활에서 매우 심각한 과제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산에서 시집왔다는 김탁0씨의 모친(80)과의 인터뷰는 그러한 물사정을 잘 드러내준다.

(그런 물통 만드는 것이 난산리만 그런 건가요?) 다른 딘 모르쿠다마는 고성리는 큰 사시통, 사시통해서 나는 물이 이십디다. 막 깊은 디서 두레박질 해여그네, 그런 통을 만들지 안해십디다. 그런 사시통만 이서나고. 고성 웃동네. 난산리만 물이 어려워수다게. 고자피는 막 물이 널어지나네. 그런 석회통 안 만들어수게. (고자피는 어디입니까) 수산 알아지쿠과. 수산2리. 수산2구. 수산으로 조금 더 올라간 디. 거기는 소못 물이 대천 바다. 난산리만 막 어려와수다. 우린 고자피서 살당 여기 시집오랑. 고자피서 물이 대천 바다에서 살당 오랑 여기 와보니까. 물이 어서부니까. 비 오당 개민 쪽박 아져그네 길에 물 뜨레 가나수게. 분시 모른 사람은 못살아. 첨 오라부난 뭐가 뭔지 몰란. 여기 사는 사람은 비 온민 빌레에 호록헌 디 물 안 골름니까. 그거 빌레에서 막 똘라옵니께. 거 석회통 안해도. 호 호. 석회통 안해도 비가 오라민 박새기 두 개 아졍 물 똘랑 가져옴니께. (그럼 평소에 빌레 청소도 했겠네요.) 에 에. 옛날엔 쇠똥 이신디도 먹어수게. 옌날엔 경해도 병에 안 걸려신디 요새는 너무 맑아져도 병이 하우다.

난산리에서 물이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언내용은 비가 오고나면, 바가지 두 개를 들고 가서, 빌레밭에 고인 물을 뜨러갔다는 것이다. 그게 그냥 다니는 길에서 떠오는 것이며, 실제로 쇠똥이 있는 곳에 고인 물도 떠서 먹었다고 할 정도이니, 이곳의 물 사정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난산리에서 식수를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빗물을 받아서 이용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식수를 조달하는 방법은 성읍리에서 볼 수 있듯이, 나무라고 하여 나무줄기를 타고 흐르는 빗물을 항아리로 유도하는 방법으로 빗물을 받는 방식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는 원활하게 일상생활의 모든 식수공급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멀리 떨어진 이웃마을에서 물을 떠오는 것은 난산리 사람들에게는 거의 일상생활에 가까운 일이었다.

옌날에사 물이 막 귀했지마는.. 아이고 옌날은 저디가서 물 길어와수게. 산 저끄띠가서 물 질어오고, 신산리 내려가서 바당쪽에 가서 산물 내리는 거 단물이엔 헌거 거까 질어오고 경허당 수도관 터지니까 아니고 이거구나하고.. (수도가 들어온것은 언제쯤입니까?) 거 몰라, 그거 누게 기억햄수과. 아이고. 경허난 결혼 행 오란 혼 우리아이 덜 .. 혼 사십년 조금 넘으난 나오라실 꺼우다. 몇 핸진 잘 몰라도.. 우리 딸이 시방 마흔일곱인디. 그 딸이 다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헐 때에 수도 들어와네. 그 마흔일곱 난 아이가. 게난 마흔해 조금 지나나 마나해서.

그때는 산에서도 길어오고 신산에서도 길어오고. 그렇게 길어오고, 마차 신 사람은 마차에 싯꺼오고, 쇠 이신사람은 쇠로 싯꺼 오고. 우리는 기냥 우터레 질머 와수게 (짊어지면 물허벅에…) 허벅에 질빵에 (질빵이 뭔가요?) 산디짚으로 꼬앙 허던… 박새기, 그 다음에 대구덕. 경행 짊어지아졍 (물 뜨러는 매일 갔었나요?) 맨날? 아침에 가 오랑. 집에서 아이들 먹어불면 또 지러 갔다오곡. 아이고. 지금 오십네살 난 딸이, 가이 국민 학교 다니멍 물 질엉. 그 쪼글락헌 아이가 물질 허건디. 국민 학교 강 오랑 가이가 물 질엉. 나 지는 허벅에 지엉. 개난 시방 물허벅 지난 크지 안허고랜 헙니다. (그러면 그때는 우물물은 못 먹었습니까?) 무사 못 먹습니까. 그 집안 사람네 밖에 못 먹어수게.

김탁0씨 모친에 의하면, 그 당시에 물허벅을 지고, 아침이나 저녁으로 신산으로 다니던 것은 매우 일상적인 삶의 모습의 한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난산리에서 물을 뜨러 갔었다는 신산리 바닷가는 대략 직선거리로 3킬로미터 정도가 된다. 이는 구불구불한 옛날 길의 모양을 감안한다면 대략 5킬로 정도되는 거리를 물허벅을 지고 매일같이 다녔다는 이야기이다. 난산리에서 떠오는 물을 단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물이 이네들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짐작케한다. 마치 쌀이 귀하던 시절 하얀 쌀밥을 곤밥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난산리에 공동수도가 들어온 것은 매우 놀랍고도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난산리에서 공동수도가 들어온 것은 김탁용 모친의 기억에 의하면, 40년전인 1970년경에 공동수도가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3. 개인 물통

07김씨종갓집물통
김씨종갓집 개인물통

09김씨종가댁집수통
개인집수물통

난산리에는 집안에 물통을 만들어놓은 집이 몇 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김탁0씨 종가댁과 김정0씨 종가댁 두 집이며, 실제로 대개의 마을사람들의 기억에도 빗물을 저장할 수 있는 물통을 개인적으로 만들 수 있었던 집의 몇 집 안 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렇게 개인 집안에 있는 물통은 외부사람은 이용할 수 없는, 그 집안사람만 이용할 수 있는 물통이었다. 물이 귀한 만큼 물을 둘러싼 소유의식도 매우 철저했다고 할 수 있다.

(물받는 통이 집집마다 있지 않았나요?) 에 에. 그거 헐려면 그때도 그만큼 어려우니까. 통 가진 사람이 없어. 세멘도 귀하지마는 돈이 없어. (그 통 만들때도 시멘트가 있었는가 봄니다.) 옛날에도 초가집을 짓엉 사는데, 앞에 담을 다가지고, 세멘 앞에만 조금 세멘 칠행.. 부잣칩이라고 해서… (그런 우물하나 만들려면 사람을 많이 불러야 하겠네요.)

(우물 만들때는 어떻게 만들었나요. 기술자가 따로 있었나요.) 우물 만드는 거. 석시라고 해서, 땅 파고 담 다으고, 수산 강 빌어 당 해서. 사람 둘이 오라그네. 아이고 밥 주고 돈 주고 해야주게. (돈은 얼마정도..) 아이고. 몰라 몰라. 개난 매 집에 허지 못 했주게. (물통을 공동으로 쓰지 않았나요?) 아니 아니 우리만.. 아이고 옌날에 저거 안헌 땐, 나무에 새로 해 그네 영 묶어그내 촘이엔 해그네 그거 다 받앙. 나무 물 행 받아먹고. 경 안허민 신산리 가고 그랬지. (난산리에는 이런 우물 있는 집이 몇 집인가요?) 여라 집 이신디 다 모사 부러신디 우리만 못 모상 있주. 다 모사 부러서. 요 안집에도 이서나고. 저 부잣집 기와집에도 잇고. (같이 먹진 안했나요?) 자기만 헌건 자기만 먹지.

지금 물통이 남아있는 두 집은 두 곳 다 그 집안의 큰집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종갓집이었다. 물통이라는 것이 단지 빗물을 받는 저수조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당시에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자를 신산리에서 인건비를 지불하면서 데려와야 했다. 당시에 집을 지을 때에는 마을내의 목수와 미장공, 그리고 흙질하는 사람들이 인건비를 받지 않고 단지 먹을 것만 제공받으면서 일을 도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신산에서 기술자를 부르는 일은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물통의 물은 집안에서 큰일이 있을 때나 쓸 수 있는 귀한 물이었던 것이다.

김탁0씨 종가의 물통은 물통의 평면적이 넓게 만들어진 형태이며, 특별한 물받이를 위한 장치가 없이, 물통위로 떨어진 빗물이 자연스럽게 저장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물통에 떨어진 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위를 시멘트로 완전히 발라놓은 것이었다. 난산리에서 이러한 물통을 ‘석회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멘트 모르터를 대단히 고급재료로 여겼던 당시의 가치가 내포된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집을 지을 때의 풍속을 들어보면 부잣집에서 집을 지을 때에도, 집의 외벽을 형성하는 돌로 된 벽을 만들 때, 쌓기는 흙을 이겨서 틈을 메워 쌓지만, 다 쌓고나면 돌 틈을 시멘트로 살짝 발라서 마무리를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은 시멘트 모르터가 다른 재료보다 물을 차단하는 효과가 탁월하다고 믿었던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김탁0씨 종가의 물통처럼 시멘트로 완전히 발라진 형태는 매우 고급스러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김탁0씨 종가댁의 물통이 꽤 넓은 형태로 만들어진 반면에 김정0씨 종가에 만들어진 물통은 크기는 작은 대신에 물통의 깊이는 깊게 만들어져 있었다. 김정0씨 종가 며느리(여,53)에 의하면, 애들이 행여 물통에 빠지는 사고가 있을까봐 뚜껑을 만들었다고 한다. 물통이라는 것이 식수목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물통을 덮는 이유가, 먼지나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하기위해서일 것 같은데, 대개는 이렇게 물통에 뚜껑을 만들어 덮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김탁0씨 종가댁의 경우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물통에 물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 지붕의 선홈통을 연결하여, 물통으로 물을 유입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일전에 토평의 귤밭에서 본적이 있는데, 종종 남쪽지역의 과수원에서 여전히 이런 방식으로 물을 저수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아마 김탁용 종가의 물통의 평면적이 작은 것으로 보아, 지붕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방식은 나중에 응용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계획되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방식은 초가지붕에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이 물통이 만들어진 시기는 지붕개량이 이루어진 새마을 운동의 시기와 맞물려서 판단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여: 우린 큰집이라부난 하도 물을 하영 쓰젠 해부난. 옛날엔  받았지 안허여. 경해신디 우리할머니가 통 파그네. 두레박 닮은 걸로 행그네. 지금 물통 이서 우리.

남: 그것이 빗물 봉천수 받는 건데. 지붕에서 그 통으로 가게끔 함석으로 해서. 물 받이 했지마는 이렇게 물 내려가게끔. 함석으로 만들어서 지붕에 물이 글로 내려가게끔. 그렇게 해나서. (공동우물의 물은 큰일 할 때만 사용했다면, 그러면 평상시 밥 헐때는 어찌했나요?) 평상시 밥헐때는 신산리 가는디. 거기 나는 물이 있주게. 지금 기상대 헌 그쪽에. 거기 물 길어다그네 밥해먹고 했주게.

남: 수도는 거기 결혼하기 전이니까. 73년도. 결혼 헌 후에 수도 걸었거든.

여: 우리는 경했지만, 그전에 공동수도가 이서수게.

남: 그 공동수도 먹다가 개인으로 수도 걸게 되었지. 그 앞선 거는 석회통, 공동수도, 그다음엔 개인수도, 집집마다.

김정0씨 종가댁에서의 면담에서는 개인수도를 건 것이 1973년도라고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었다. 앞전에 김탁0씨 모친의 증언에 의하면, 공동수도를 건 것도 1970년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마을에서 공동수도에서 물을 먹었던 기간은 대략 3~5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가집에 이렇게 만들어진 물통은, 사실상 평소의 식수를 공급받기 위한 목적이기 보다는 집안의 대소사를 대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한 가족의 일상적인 생활을 위한 식수공급은 수고스럽더라도 신산리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이 석회통을 만드는 금전적인 부담보다는 덜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김탁용의 종가댁에는 밖거리를 손청거리라고 하였는데, 손청거리의 세 칸중 한 칸은 방에왕이라고 하여 남방애가 있었다고 한다. 비록 혈연관계의 집안사람들이 들락거리기는 하였지만, 그만큼 가족외의 외부인이 많이 왕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항에는 벌레들이 알을 까거나 살아서 물을 오염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개구리를 길렀다고 하는데, 아마 물통에서도 그리 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서 혼탁해진 물이지만, 밑에서 샘이 솟는 물이 아닌 고여 있는 빗물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4. 석회통

개인 집에 이렇게 물통을 만드는 것은 비용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개인물통이 없었던 사람들은 모여서 공동으로 물을 저수할 수 있는 물통을 만들기로 하였다. 이 역시도 빗물을 저수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물통의 깊이는 깊지 않은 대신에, 넓이는 대략 집 한 채 정도의 크기로 넓게 만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한 번에 여럿이 여기 저기서 물을 떠가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이 물통의 명칭 또한 석회통이었다. 지금은 남아있는 시설이 없어서, 제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구술내용에 의하면 가운데를 향해 완만한 경사를 가지고 있는 넓은 그릇과 같은 모양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에 석회통이 있었다는 곳
예전에 석회통이 있었다는 곳

지금 보건소 있는데, 퐁낭 있는데, 거기 석회통 이서서. 거기 물이 귀허니가. 동네 대소사나 잔치 날 때 몇 허벅씩 배당을 했었주게. 저 웃동네도 석회통 이서서, 걱대머루 가는데. 다 모사네 다 없앴주게. 우린 큰 집이라부난 하도 많이 쓰젠 허난에, 경해신디

김정0씨 종가댁에서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마을의 석회통의 물 역시 마을사람들의 대소사가 있을 때에 많은 물을 사용하기 위한 것이지, 평소의 식수를 공급받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집안에 대소사가 있으면, 손님들을 치르기 위해 물을 많이 써야 하는데, 그 물들을 신산에서 전부 날라오기가 어렵기 때문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공동 물통을 만들었다고 해도, 편안하게 그 물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쓸 수 있는 양을 제한해서 쓸 수 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공동 물통은 집안의 대소사를 대비하기 위한 물을 저축해놓은 저금통인 셈이다. 대소사가 없을 때면 그 물을 식수로 쓰기도 했겠지만, 대소사가 가까워지면 물을 아끼기 위해서 먹는 물은 신산 등의 물이 나는 이웃마을로 물을 뜨러 다니곤 했을 것이다.

경허고 마을에서 우물을 맨들어수게. 석회통. 저기 호나. 아래 곰베낭 호나. 통으로 어느 날 혼집에 얼마 배당을 시켜그네. 몇 허벅씩 행 갈라오고 해나수다. (하루에 몇 허벅씩인가요?) 호루에꽈. 며틀에. 열흘이면 열흘간에 다섯허벅이엔 허나 .. 물 갈라그네. (그 셈은 누가 합니까?) 책임은 반장 내 세움니께. 뽑아그네. (마을에서 공동 물통을 판것은 언제쯤인가요?) 수도나기 전에 공사를 해 그네 물 갈라먹다가 수도나난 그 통을 몬딱 파내수게. (그런 물통이 마을에 세 개가 있었나요?) 세 개가 아니고 막 여라 개 이서수다. 마을 안에도 있고. 배께때도 있고 경허우다. (그 물은 땅에서 솟나난 것입니까?) 아니우다. 석회 공그리(콘크리트) 해그내 하늘에서 빗물 받은 거우다. 빗물 받는거 마씸. (저기 큰가름에 있는 할머니 물통도 물 받는거지요?) 빗물 받는거. (여기는 우물 중에서 물이 솟나나는 우물은 없습니까?) 솟아나는 물 어수다. 통은 넙짝허게 허믄. 비슷허게 물들 받아지게 만들어. 옛날 경 헙디다. (그 물을 먹는 물로…) 아이고, 먹습니다. 예 예 먹고말고. 아이고. (평소에는 먼지 안들어가게 뚜껑이라도 덮습니까?) 아니우다. 개인집엔 덕을 수도 있지만. 덕음도 해십디다. 거 덕으지 못해. 하도 널러부난에. (거기에 두레박은 매달려 있었나요?) 두레박은 이녁냥으로 만드나 사 오랑 해와수게. 양철에 영 해그네. 이녁냥으로 아져가. 그거 빌려 줌니까게. 재기 물 떠그네 (넓으니까 한꺼번에 여럿이서 물도 떠가고 할 수 있었겠네요.) 예 예 널브난 한꺼번에 와작착허게. (그 옆에서 빨래도 헙니까) 빨래는 따로 떨어져서. (그것을 우물이라고 합니까?) 석회통물. 동동이면 동동이 석회통물, 섯동이면 섯동이 석회통물. 우리는 동동이엔 해수다. 곰베낭 동동네 석회통. (석회통물 말고 물을 가르키는 말이 있었나요) 곧는 말? 아아고 몬저리. 몬저리도 빗물 골른 물 먹는디. 돌다와지고 파지고. 그거 어느 고려시절에. 만들어신지. 돌다와지고 그런거 합니다. 지꾸물도 싯고, 지꾸물은 저 오름 조끄띠. 요즘은 그 물통도 메와져신지 모르쿠다. (그러면 석회통을 하기 전에도 돌담으로 만들었겠네요?) 건 모르쿠다. 석회통 만들기 전에는 신산리 가그네 그 찬물. 바당에 먹는 물이엔 허그네 그 동글락헌디 가그네 질어오고. 또 저기 몬저리가그네 질어오곡 해수다.

(마을에서 물통을 만들때는 돈이나 나라에서 지원해 주었나요.) 아니, 개인이 돈 모아그네. 쪼금썩. 요새 같으면 조금 허면 융자여 무시거여. 그때는 어서수다. 이녁들 조금씩 내놨주. 책임자 해그네 그런거 만들엇주.

물에 대한 소유의식은 두레박을 같이 쓰지 않고 가지고 다녔던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두레박은 신산리에 물 뜨러 갈 때도 가지고 가는 것이었고, 석회통의 물을 뜨러 갈 때도 가지고 가야하는 것이었다. 눈앞에 물이 가득해도 두레박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고, 그 두레박을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결코 빌려줄 수도 없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우물을 같이 쓴다고 해도, 두레박을 제각기 들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추자도의 우물 사용방식에서도 똑 같이 들었던 이야기이다. 그만큼 물이 귀하기도 하고, 그에 따른 도구들 역시 귀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주민과의 면담에서는 마을공동재산으로서의 석회통을 어떻게 관리하고 운영하였는지를 짐작케한다.

한00 : 우물하나도 한집에 하나씩 만들 수 없어요. 난산리 같으면 반 해그네, 그 반에서 우물하나 해그네. 여긴 허벅이엔 허주. 다섯 허벅이면 다섯 허벅. 열허벅이면 열허벅 씩 표를 똑 고트게 나눠. 이건 반 태우듯이 똑 고트게 갈랑 그 나머지기는 똑 문 잠거그네 그 나머지기는 바가스로 하나도 못 아져. (그 석회통 해서 물 나눠주고 헌 때가 언제인가요.) 전쟁 넘언. 그 추룩 촌에는 삶이 경 어려와수다. (그런 물통이 몇 개 있었나요?) 그거 난산리에도 한군데 밖에 없었어. 한군데도 그거 가입된 사람이 있고, 아니 가입된 사람이 있고,

김00: 가입된 사람은 했고, 돈 어신사람은 가입을 못하면, 해당이 없어요…

한00: (지금식으로 하면 회비 같은 것을 내고 했나요?) 운영을 허자면 돈 내야주. (마을에서 제공하는게 아니구요?) 마을단위가 머 없었어요. 그때는. 우리 지금 허면은 친목 허듯이. 만들때 협조한 사람들이 있주. 돌맹이도 해가곡. 그거 협조헌 사람들은 30명이든, 20명이든. 조 대어그네 그걸 나눠먹곡. 그때 협조 안 헌 사람은 물도 한 바가스도 주지 안허여. 그렇게 물이 귀해낫주.

한00: 동업허는 거지. 동업. 그러니까 파가지고, 물을 나눠먹자. 그게 또 동네에서 가입 못 헌 사람은 해당이 없게 되는 거주.

김00: 돈을 내사 가입허는 거주게. (그것은 만들때 한번만 내는 겁니까?) 한번만 내는 것이 아니고, 책임자가 있주게 책임자가.

한00: 책임자가 아니고, 한 번씩 내는데, 내었다가도 만일에 잘못되어서 물이 아졌다가도 빠지면 수리를 필요로 하지. (그러면 정기적으로 돈을 거두었겠네요.) 아마, 그랬을거라. (물통의 크기가 어느 정도 되었나요?) 십오 평 내지 이십 평 정도… (그런 물통을 지금 볼 수 있는 데는 없지요?) 다 메워. 그전에 통 안 파가지고 길어먹던 물통도 다 메와 가지고… (지도에 보면 무슨물 무슨 물 해가지고 있는데, 가서 볼 수 있는데가 있나요.) 다 있죠. 다 멀어. (이 물들이 다 나긴 나는 물이었나요.?) 나는 물이 아니고, 옛날 우리가 물통을 보며는 간단히 생각하면 지형 낮은데 물이 이섬직 헌데, 높은 곳에… 동물이엔 헌 곳도 지형이 조금 올라온디. … (그거는 샘솟는 물인가요?) 나는 물은 아니지마는 오래 아자(앉아). 나는 물은 아니고. 동산이라도 물은 오래 안쭈.

난산리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석회통을 만들게된 시기를 정확하게 언급하는 사람을 만날 수는 없었다. 대략적으로 추정해 보면, 김탁용 종가댁의 우물을 만든 것도 40년 전쯤이라고 하였고, 공동 물통으로 만들었던 곰베낭 석회통은 공동수도가 들어오는 바람에 몇 달을 써보지도 못하고 폐쇄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특이한 것은 공동수도가 들어왔을 때, 김탁0씨 종가에서는 그때에 집도 지었지만, 개인 물통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곰베낭은 알동네서 허고, 메구렁은 웃동네서 허고, … 곰베낭도 얼만 안핸에 수도가 나기 시작했져. 그건 판 오래 쓰지 못했주. 수도도 그자 거리마다 걸었주. 집에 동기고 어떵허고, 안핸. 공동수도 허난. 이게 무슨 온말인가 거진말인가 그자. 살게 됐젠. 하 하. 우리도 이 집 짓을 때 올레에 공동수도 거기 간 질어단 삭강 핸. 우리 이 집 짓을때 수도 난.

즉, 마을에서 반장을 내세워 인위적으로 석회통물을 만들고, 개인집에 물통을 만들고 하였던 시기와 공동수도가 들어오게 된 시기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된 1970년을 전후로 하여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사건들이었다는 것이다. 물과 관련해서 이 시기의 난산리는 매우 많은 변화의 과정속에 있었던 것이다.

난산리에서 석회통을 공동으로 만들고 그것을 쓸 수 있는 양을 정해서 사용하던 시기는 그리 길었다고 할 수 없지만, 마을의 공동체 사회를 이루고 있는 역사의 과정에서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수도라고 하는 획기적인 급수시설이 바로 등장하기는 하였지만, 물을 자체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이루어진 자체적인 조직과 규율의 정비 등은 급수문제를 해결하기위한 사회적인 조직개편과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마치며

통상 타지역에서는 무슨 물이라고 하는 명칭이 있는 물통이라는 것은 용천수가 있어서 물이 고인 형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난산리에서 나는 물이라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조개물’이라는 컵 하나정도 뜰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샘이 있는 정도이고, 나머지는 지형적인 이유로 빗물이 고이게 되는 그런 봉천수들이었다. 그나마, 그런 봉천수가 가능한 지형적인 특징들이 이 난산리를 존재하게 하였던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 본다.

이제까지 마을의 형성에 있어서 용천수위주로의 판단을 했던 것을 난산리에서는 유보하지 않을 수 없다. 난산리 마을회관 앞에서 현재 남아있는 봉천수와 같은 물통이 있지 않을까해서 면담을 하였지만, 한00씨와 김00씨는 물통들이 걸어서가기엔 다들 먼 곳에 있다고 하기도 하고, 그 먼 곳에 있는 물통이 지금 남아 있지도 않을 거라고 하면서,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독특한 것은 이러한 봉천수들이 낮은 지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지형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이 한참동안 고여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하부의 지질이 빌레와 같은 암반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 보지만, 현재로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난산리 마을을 존재하게 한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봉천수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난산리의 물을 이해하기 위한 현장연구의 가장 아쉬움이 되고 말았다.

1970년을 전후로해서는 난산리에서는 물과 관련해서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항으로 물을 받거나, 신산리까지 아침 저녁으로 물을 길러다녔던 난산리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조를 짜고, 공동물통을 파서 물을 나누어먹는 조직을 만들어 물이 부족한 마을환경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시기였다. 비록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공동수도가 공급이 되어, 그러한 조직은 의미없게 되어버렸다고는 하지만, 시멘트모르터라는 재료가 그들에게는 물부족을 해결할수 있는 용이한 소재로 다가왔던 것이다.

물의 이용과 관련한 난산리의 현장연구는 자연극복의 과정을 통한 정주지의 형성모습을 확인하게 하여준다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난산리의 어떤 매력적인 이유가 용천수가 없는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게 하였는지는 여전히 비밀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러한 악조건을 빌레에 고인 물을 떠 마시면서 극복하였던 난산리의 주민들이, 근대화의 과정속에서 짧은 기간이긴 하였으나, 자체적인 급수를 위한 석회통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인 규약을 정하고, 자체적인 조직을 만들어 자금을 조달하고 인력을 동원하였던 역사적 사건은 자연환경을 극복해가는 인간 문명사의 작은 모델로서 중요한 가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 ]

오00: 여, 84, 김탁0씨 종가댁 며느리, 자택방문 인터뷰.

김00: 남, 64, 김정0씨 종가댁 종손, 자택방문 인터뷰.

김00: 여, 63, 김정0씨 종가댁 며느리, 자택방문 인터뷰.

고00: 여, 80, 김탁0씨 모친, 자택 방문 인터뷰.

한00: 남, 78, 마을회관 앞에서 인터뷰.

김00: 여, 70, 마을회관 앞에서 인터뷰.

[현장조사일]

11월 26일 : 김탁0 종가, 김정0 종가, 김00씨

12월 20일 : 김탁0 모친

12월 21일 : 김정0 종가 며느리, 마을회관 앞에서 마을 주민

<참고문헌>

향토지발간추진위원회, 『난산리지』, 창원인쇄사, 1999

Archi Jeju
옛말에 '배는 짓고, 집은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집을 짓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희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건축설계와 관련한 정보를 최대한 제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집을 만드는데 저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Related Stories

Discover

제주건축단상

. 건축사협회에서는 '제주건축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제주건축을 주제로하는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여왔습니다. 모두다 실무를 하는 건축사들이면서 개인적인...

1901: 봄날

200330............................ 이제 1층 벽체가 마무리 되어갑니다. 많은 부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진입부분과 2층 창문의 디자인이 바뀐게...

빈집을 돌아보며..

. 가끔 시골의 빈집을 둘러볼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삶에 흥망성쇄가 있듯이 빈집을 보면서 삶에 대한...

집과 물 이야기

. KBS 대담프로그램에서 주거공간과 관련해서 물 이야기를 같이 나누어보았습니다. 저는 주로 집을 지을때 물부조를...

깨끗한세상..

. 간단히 평면을 잡고 이미지를 그려봅니다.  초기의 이미지여서 현실성이 없는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 설계를...

안세미물

. 봉개동 명도암에 있는 안새미물통이다.  굴과 같은 파인 곳 안에서 물이 솟는다....

Popular Categories

Comments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