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생활문화사(한동리)

길의 생활문화사(한동리) – 한동리는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31km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한동리는 신작로라 불리었던 일주도로에 의해서 크게 웃동네와 알동네로 나뉜다. 한동리를 전체적으로 보면, 남북방향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북동쪽 해안에서 남서쪽 중산간 마을로 이어지는 배치형태를 하고 있다. 웃동네와 알동네 사이에는 일주도로가 지나가고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마을 자체가 분리되지는 않았다. 제주도에서는 상도리와 하도리처럼 해안마을과 중산간마을이 이름으로는 연관관계를 가지지만 마을조직이 완전히 분리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한동리는 웃동네와 알동네가 일정 거리 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하나의 마을로 생활권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이다.

한동리가 어떻게 두 개의 마을로 나뉘어지지 않고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웃동네에 복지회관 옆에 통물이 있었던 자리의 표석을 보면, 웃동네에서는 식수를 구하기 위해서 알동네로 걸어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통을 파기 전에 웃동네에는 용천수가 없었으므로 물을 뜨러 알동네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자연스레 보행로가 생기게 마련이다.

웃동네와 알동네를 마을내의 주요한 길은 노인회관에서 리사무소 앞으로 연결되는 길이었다. 지금은 한동초등학교 서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넓혀져 있지만 본래 한동에서의 중요한 마을길은 모살동네 앞을 지나 한동초등학교 동쪽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지금의 복지회관이 있는 마을 입구를 걱대목이라고 불렀다. 그곳은 웃동네에서 알동네로 내려오는 길로 경사가 급해서 멀리 바다가 시원스레 보이는 길이다. 예전에는 바다가 보이면 좋지 않다고 여겨서 재액을 방비하는 차원에서 걱대를 세웠고 그래서 길 이름도 걱대가 있는 마을 입구라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걱대목을 지난 곳은 한동초등학교 동쪽인데 그곳을 ‘논동산’이라 불렀고 ‘새통물’이라는 물통도 그곳에 있었다. 논이라는 것은 농사를 짓는 ‘답(畓)’도 논이라 하였지만 물이 고여 있는 너른 물통도 논이라 하였다. 논동산의 논은 그러한 물통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논에는 소들이 먹는 물통도 있었고 식수를 뜨는 물통도 있었다. 웃동네 사람들은 1935년 웃동네 물통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물을 뜨러 수시로 알동네 논동산으로 드나들었다.

웃동네 살멍 웃동네 물이 어섯주. 게난 학교 이엄에 물이 시어나서. 둥글럭허게 세멘 허곡 해연. 물 길엉 먹곡. 경행 길어당 먹당 그 위에 통 파네. 통 파도 물이 아니 나난. 열두 발 통을 파서. 경 행 통 파네 먹음 시작허나네 여기 물을 아니 먹어서.

학교 옆에가 ‘새통물’이 싯고. 영헌 바닥에 논이 이서. 논. 논이 시나네 거기 물을 소가 와네 멕이고. … 비 많이 오민 물 골….

<임00, 여, 1925년생, 한동리> 2013.05.29

물통이 만들어진 것이 1935년의 일이므로, 임을생 할머니의 기억도 10살 정도 때의 기억이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적 설명이라는 것이 85세 이상이 되는 노인들도 5~6살 때의 기억으로나 더듬을 수 있는 일이다. 때문에 물을 길러 아랫동네로 왔었다는 이야기가 대개 직접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노인회관 옆의 물통이 만들어지기 이전과 이후의 웃동네와 알동네의 관계는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근대화시기의 문명이라는 것, 그리고 편리함이라는 것은 대체로 공동체의 끈을 느슨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지금은 게이트볼장을 만들기 위해서 물통을 메워버린 상태이다. 예전에는 물 길러 모여들었던 장소에서 이제는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모여드는 장소로 바뀐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장소가 한동리에서는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방추굴과 계룡동, 아래는 방추굴의 현재모습
방추굴과 계룡동, 아래는 방추굴의 현재모습

웃동네 사람들이 알동네로 물을 뜨러 다녔던 길은 또 한군데가 더 있었다. 웃동네의 동쪽편, 방추굴에는 많지는 않았지만 몇 개의 가호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웃동네 물통이 만들어지기전 웃동네 대부분은 사람들은 한동초등학교 동쪽편의 논동산의 물통으로 물을 뜨러 갔었지만 방추굴 사람들은 그보다 더 동쪽에 있는 하늘통의 물을 뜨러 갔었다. 그 길은 매우 좁아서 ‘조븐질’이라고 불렀다. 한동리 웃동네에서 알동네로 물을 뜨러가는 길이 두 갈래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물은 일주도로 있지요. 거기 물통이 있었어요. [바로 들어오는 입구에 물 막 고인데 말씀인가요?] 아니, 거기 말고 그 밑에, 쑥 내려오면… 또 신작로에, 일주도로.. 일주도로 바위에 하나 있었고, … [방추굴 사람들은 ] 거기 물 떠다 먹고.

<오00, 남, 1936년생, 한동리 계룡동> 2013.08.31

08-조븐질

이 두 개의 길은 서로 다른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방추굴 사람들은 일주도로 아래에 있는 물을 길어먹다가 한 집 두 집 지금의 계룡동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한 후에는 전에 살던 마을로 농사를 짓기 위해서 그 길을 반대방향으로 걸어 다녔다. 방추굴과 계룡동 사람들에게 조븐질은 생활공간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방추굴 사람들이 완전히 계룡동으로 내려온 이후 이 길은 자연스레 일상적으로 왕래하는 길로서는 수명을 다 했다.

 

 

한동리의 군도가 계룡동이 아닌 섯동네방향으로 선회하여 만들어졌다.
한동리의 군도가 계룡동이 아닌 섯동네방향으로 선회하여 만들어졌다.

방추굴이 있는 한동리 웃동네와 계룡동을 이어주는 길은 조븐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웃동네와 계룡동으로 연결되는 길은 노인회관을 지나 걱대목 앞을 지나는 길로 실제 한동리의 중심길이었다. 그 길의 폭을 확장하고 마을의 중심길로서 더 입지를 굳건히 하려던 계획이 있었다. 북제주군이 제주시로 행정개편이 된 것이 2006년의 일이다. 마을안길을 확장하는 계획이 북제주군의 지원을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이 도로의 확장계획은 그 이전의 일이다. 토지대장에서 1113-3번지 도로의 지목변경이 이루어진 것이 1993년으로 되어있으므로 아마 그 해가 도로확장이 이루어진 해일 것이다. 벌써 20년이 지난 일이다.

동법사와 집 사이에 밭이 있어요…아주 네모난 장방형. 여기 집 살던 주인이.. 제가 확인은 안했어요. 도로 확장을 해야잖아요. 도로 확장 하는데 이 밭을 내놓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한분이 그랬나요?] 아니 한 분만이 아니라, 아무튼. … 여기 관계된 밭들이 안 나와서 저쪽으로 뺏대요. 근데, 지나고 나니까 사람들이 후회하는거 같애요. 저쪽으로 뺄 길이 아니예요.

<익명, 여, 1953년생, 한동리 웃동네 > 2013.08.31

20년이 지났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때 일이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었던 것은 그만큼 길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 길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공터 이상의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한동리 사람들 사이에서 군도라고 불리는 이 길은 당초의 걱대목을 지나는 계획에서 벗어나 다른 형태가 되고 말았다. 당초 군도의 진행방향은 알동네의 섯동네와 계룡동의 중간지점을 향해 있었다. 당초의 방향대로 군도가 진행이 되었다면 알동네의 공간구조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며, 계룡동과 웃동네와의 관계가 지금보다는 훨씬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길을 통해서 공동체의 삶은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아키제주 건축사사무소, Archijeju Architects, Jeju Korea

Archi Jeju
옛말에 '배는 짓고, 집은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집을 짓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희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건축설계와 관련한 정보를 최대한 제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집을 만드는데 저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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