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생활문화사(신산리)

길의 생활문화사(신산리) – 고종달이 제주도 동부지역의 수맥을 끊어놓았다고 전하지만 해안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는 끊지를 못한 모양이다. 신산리 해안에는 꽤 많은 용천수가 솟아난다. 해안가도 아니고 바다라고 말해도 좋을 그런 빌레 틈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는 제주에서 만나는 신비로운 자연현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바닷물이 들면 짠물이 나오고 썰물이 되면 싱거운 물이 나오는 것은 해안에 가까이 있는 물통에서는 당연한 현상이다. 아니지 여기서 물 맛을 싱겁다고 하면 안된다. 제주에서는 이러한 물을 단물이라고 한다. 바닷물의 짠맛과 대비하여 달다고 표현한 것일 것이다. 단물이라는 말에도 이항대립적인 야생의 사고를 발견하게 된다.

옛날엔 맛물 먹었댄 헙디다. 나는 본래 신산리 사람이 아니고, 온평리 사람인디. 여기 완 보난 거기 물(물통) 먹어수다. [여기 물통 있으니까, 저기는 안갔겠네요] 예. [난산리 사람들은 계속 저기 오지 않았나요] 예 저기 맛물 위에 또 먹는 물이 이서나십주. 그 통도 다 메워비언 어수다. [길 위에서 먹고, 맛물에서는..] 목욕하고, 빨래하고.

<익명, 여, 75세, 신산리, (23살에 온평에서 시집옴)> 2013.09.04

신산리의 대표적인 자연 용천수는 동동네에는 맛물이 있고, 섯동네에는 우알물이 있다. 맛물이나 우알물이나 해안가에 있는 용천수라고 하기에는 바닷가로 많이 걸어가야한다. 이럴때는 바다용천수라고 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운 말일 것이다. 필자도 우알물에서 더 바다방향으로 걸어가다가 밑에서 솟구치는 물줄기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었다. 이래서 김정(金淨 1486~1521)의 『제주풍토록』에서는 제주해안의 물은 짜지 않아서 소금을 만들기 어렵다고 하였나보다. 바다용천은 제주의 동부지역에서 만나는 독특한 자연현상이다.

09-맛물
신산리 맛물

제주인들이 식수를 공급받는 방식이 용천수가 아니면 다음에 언급할 물통(우물)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산간마을인 난산리에서는 용천수가 없고 우물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수도가 들어오기 전 까지 빗물이 모여 고인 봉천수에 의존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수도가 들어오기 전 식수를 구하는 방법은 용천수와 봉천수라는 자연환경을 이용한 방법과 인위적인 물통을 파서 식수를 얻는 방법으로 대별될 수 있을 것이다. 길과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인터뷰 중에 물과 관련된 흥미로운 민속지식을 접하게 되어서 잠깐 언급을 해야겠다.

강00: 바닷물. 바다에서 솟아나는 물 길어다 먹어수다게. (고00: 빗물도 우물 파그네. [빗물 고여서 먹는 물이 있었는가요?] 저기 버절. 소그못디. 맛물.. .. 버절 물 길어당 먹어난디 이서. [버절은 웃동네 있는 건가요?] 아니 부락 배끄띠.. 맛물은 솟아나는거. 물들민 나고 싸믄 뽀따불고. ) 강기택: 버절은 빌렌데. 비가 오면 골라가지고 물이 안빠지니까. 그거 뿐이주. .. 아 소그못.. 섯동네에 소그못이엔 헌디가 거기도 비가 오면 영 못인디. 그 물을 물통을 가운데 영 만들엉. 그물 걸러졍 영 들어강. 그 물을 질어당 먹어십주. [비가 모이게끔] 만들어졌는데, 가운데 이렇게 벽으로 싸가지고. 소도 멕이고 했는디 그디는 영 싸며는 소도 못 들어갑주게. 그디 물을 빠지게시리 해가지고 그 물을 길어다 먹어나십주. … 말하자면 정화를 시킨겁주게..

<강00, 남, 1940년생, 서동> 2014.04.30
<고00, 여, 1937년생, 서동> 2014.04.30

11-소그못상상도
소그못의 설명을 바탕으로 그린 상상도

인터뷰 내용에 의하면 소그못은 봉천수의 한 형태라고 여겨진다. 민속지식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문화의 형태로 향유한 당사자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앎이지만, 직접 접하지 못한 이방인에게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고도의 지혜와 기술이 들어있는 지식이다. 분명한 것은 ‘소그못’은 정수기의 원리를 갖고 있는 봉천수의 형태였다는 것이다. 필자로서는 상상으로만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기술이었다. 현장을 찾아가서 땅의 경사와 지형으로 설명하는 촌로의 상식을 이해하기에는 필자의 지식이 너무 부족하였다. 어디 사라진 민속지식이 이것 뿐 이겠는가마는 이 부분의 관심자의 후속 연구를 기대해본다.

그러면 이제 물통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신산에서 용천수의 사정이 좋았다고는 하지만 맛물이나 우알물이나 해안에서 솟아나는 용천수였으니 불편하기는 하였을 것이다. 신산리에서도 해안 용천수를 이용하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우물을 파게 되었다. 동동네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우물을 파게 되니까 맛물에서 식수를 공급받던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그 우물마저 다 메워버려서 그것마저도 전설이 되었다. 강산이 두 번 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물이 신산리의 네 개 동네별로 하나씩 있었다는 이야기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기억이었다. 물통은 웃동네에서는 신산모루에 있었다고 하며, 알동네에는 주목정이 있는 공터 인근에 우물이 있었다. 동동네에는 맛물 위쪽 지경에 있었다고 했다.

물통은 일정시대 때 판거. 깊이는 한 6미터.. [웃동네 사람들도 여기서 물을 먹었나요?] 응, 전부.. ‘전엔 저기 나는 물이엔 헌디.’ 허기 전에는 바다. 물 들면 못 먹고, 물 싸면 먹고. 이 앞에도 물이 나고. 게난 항상 물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없으니까. .. 파기 시작헌거.

<강00, 남, 1925년생, 신산리> 2013.09.04

알동네에 있는 우물이라고 하지만 알동네 사람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웃동네에도 신산마루에 물통이 있었지만 그곳에 가는 것보다 가깝기만 하면 알동네 우물을 이용했다. 웃동네 사람들도 알동네의 물을 먹었다는 것은 어렵게 만든 물통에 대한 소유권을 동네별로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나는물’을 난산리 사람들이 뜨러 오갔다는 것에도 그러하다. 물은 귀하기도 하였지만, 귀하다고 그것을 빌미로 권리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누구나 물이 필요하면 떠 갈 수 있었던 사회구조는 물통을 중심으로 길이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또는 반대로 마을길의 중심에 물통을 파려고 했을 것이다. 알동네 물통이 있었던 주목정이 있는 거리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이다.

여기 주목정이라고 이서. 주목정이라는 것이 기둥 주 자에 거리 정 인데이. 소위 말해서 말 안 듣고 허면 거기 낭에 묶엉 두드리고, 허는디가 거기 이서나서. 거기 본래 내창 이라낫주. [그럼 그렇게 애를 두드리는 걸 본적은 있었나요?] 아니 본적은 없고. 거기 내창 메워내 위에 세맨으로 행 덕어부럿주. [내창이름은?] 엣날 이름 ‘밴고랑창’이.. 부락안에는 거기뿐. 독자봉으로 이리 연결된거. 그걸 복개시킨거. 밑에는 물이 흘르고…
<강00, 남, 1941년생, 신산리> 2013.06.12

[주목정에는 정자 같은 게 없었나요?] 어서수다게. 그 디가 터가 좀 널르니까, 사람들이… 더울 땐 어두건 나왕 놀곡허나, 거기가 주목정이엔 허연, 표 딱 써 붙이고 사람들 아장 놀게 허당, 길이 족게 차 하영 댕겨가나네. 주목정 돌만 이젠 애염에 갔다 놨지. 놀이턴 어서져 부러수게. [주목정 거기가 동네 중심이었네요.] 예.. 노인들 많이..
<익명, 여, 1939년생, 신산리> 2013.09.04

알동네의 중심거리였다는 주목정 인근의 풍경을 상상해보자. 주목정의 본래 의미를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마을의 풍경으로의 주목정은 중요하다. 이름으로는 얼핏 무슨 정자 같은 것을 연상하는 이름이지만 일단은 정자형태의 구조물은 없었고 그곳에는 독자봉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내창이 있었다. 내창의 이름은 ‘밴고랑창’이라고 하였는데 점차 차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길을 넓히기 위해 복개를 하게된 것이다. 내창이 복개 돼버린 지금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길이지만 복개하기 전에는 주목정이라는 쉼터 옆으로 시원한 개울이 흐르는 제주에서는 보기 드믄 풍경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인근에는 알동네에서 유일하게 식수를 뜨는 물통이 있어서 마을의 중심가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목정은 딱히 시설물로서의 정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분명히 정자였고, 마을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모여서 하루 일과를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그 거리에서 비석치기와 고무줄놀이를 하고 놀았다. 한켠으로는 우물이 있어서 조석으로 허벅에 물을 길러 아낙들이 모여들곤 하는 곳이었다.

12-주목정거리
알동네 주목정거리

12-주목정표식
주목정 표식

마을풍경의 변화는 편리한 문명의 유입과 함께 일어난다. 수도가 들어오면서 우물은 메워져버렸고 차가 들어오면서 하천이 복개되고 쉼터는 사라져 버렸다. 도로는 더욱 넓어졌지만 주목정에 모여 잡담을 나누면서 회합을 하던 풍경은 사라졌다. 넓어진 도로의 편리함을 위해서 지금의 마을 어른들은 노인회관에 모여서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신산리에서 주목정이 있는 거리에서 이야기가 길어지는 이유가 있다. 주목정이 있는 거리를 중심으로 지금의 신산리를 들여다 보자. 신산리와 난산리는 마을은 달랐지만 난산리 사람들이 식수를 신산리 해안에서 얻었을 만큼 보행으로 교류가 가능한 가까운 거리의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난산리에서는 마을 내에 용천수가 전혀 없어서 주로 봉천수에 의존을 하였으며 그래도 물이 부족하여서 신산리 해안의 ‘나는물’이라는 물통에서 물을 뜨러 다니고는 하였다. 신산리와 난산리를 연결하는 길은 난산리의 설촌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갖고 있는 길인 것이다. 신산리의 마을구조를 이해하는 난산에서 물을 길러 왔던 그 길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난산리에서도 물뜨러 왔었다는데. 어디로…] 난산리에서는 물을 어디왕 길어갔냐 허며는 .. 저쪽 축항 바깥으로 저쪽에 .. 탈의장 가기 전에 물통이 이서나서예.. 거기 ‘난물’.. 나는 물통인디 거기가 물도 돌고(달고), 옛날에 엿 같은 거 달이젠허민 거기 물 길어당 달이고 해나서양.
<강00, 남, 1941년생, 신산리> 2013.06.12

이제 지금의 길을 통하여 신산리 마을의 역사를 살펴보자. 지도를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신산리는 일주도로를 기준으로 한라산 방향으로는 웃동네, 바다방향으로는 알동네로 나뉘인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일주도로 아래편으로는 동동네, 알동네, 섯동네라는 세 개의 자연마을로 다시 나뉜다. 일주도로 아래의 이 세 개의 마을이 초기에 어디에서 마을이 시작되어 어떻게 확장된 것인지를 길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 가능한가.

여기서 우리가 감안해야 할 것이 일주도로가 만들어진 과정과 시기이다. 소위 신작로라고 하는 일주도로는 1914년 일본인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수탈을 위한 일주도로가 만들어지기 전에 기존의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길이 있었다. 특히 정의현과 멀지 않은 신산은 정의현과 연결되는 직접적인 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난산리와는 물을 뜨러 매일같이 난산리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이 있었다.

과거의 지도를 펴고 상상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지금의 일주도로를 기준으로 신산리 마을길을 살펴보자. 지도는 글로 쓰여진 문장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에는 읽는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그럴 듯하다. 길을 중심으로 지도를 읽어보면 신산리 지도의 위쪽에 있는 웃동네와 알동네를 이어주는 길은 일주도로와 관계없이 해안과 중산간이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지도의 아래쪽에 섯동네와 연결되어 있는 길은 일주도로에 의해 경로가 차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신산의 위쪽 1번, 2번 경로와 아래쪽 3번, 4번 경로는 길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도상의 길의 형태로만 본다면 1번, 2번길은 일주도로가 있기 전부터 있었던 길이라고 할 수 있고, 3번과 4번은 일주도로가 만들어지고 난 이후에 만들어진 길이라고 할 수 있다.

13-신산의길
좌측:현재지도(네이버), 우측: 1872년 제작된 정의지도

3번과 4번 길은 섯동네의 길이다. 3번과 4번 길이 일주도로에 의해서 길이 잘려나간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일주도로보다 늦게 만들어진 길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 말은 지금의 섯동네가 알동네보다 늦게야 형성된 자연마을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서동(취락구조)는 당연히 더 최근에 형성된 마을이다.

위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1872년 제작된 정의군지도를 살펴보자. 다행히 정의군지도에는 마을을 연결한 길이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신산리는 온평과 난산으로 연결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신산리와 삼달리는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다. 즉, 신산에서 삼달로 연결되는 길은 없었거나 있더라도 대로(한질)가 아니었다. 정의군지도에 그려진 하대로(下大路)의 경로는 지금의 일주도로의 경로와는 전혀 다르게 그려져 있다. 정의현에서 이 지역을 행정적으로 관장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신산에서 삼달 해안으로 길이 만들어져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온평과 신산 그리고 난산을 잇는 길이 대로(大路)였던 것이다.

난산으로 연결된 가로망
난산으로 연결된 가로망

다시 지금 있는 길을 살펴보면, 신산에서 난산으로 이르는 길은 신산리 사람들이 난물로 물뜨러 오는 길이 일주도로와 만나는 난산교차로 (A지점)이거나 신산리 웃동네를 통해서 올라가는 신산교차로(B지점)일 수 밖에 없다. 즉, 정의군지도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신산교차로 이하의 신산에서 삼달로 이어지는 일주도로의 경로는 기존의 길을 덧씌워 확장한 것이 아니라 새로이 개설된 길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며 신산리 섯동네 역시 연장된 일주도로를 따라서 강점기 이후에 새로이 형성된 마을일 것이라는 것이 추정할 수 있다.

길의 형태를 통해서 추정한 마을의 성장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지적도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땅의 소유권을 표시해 놓은 지금과 같은 지적도가 처음 작성되기 시작한 것도 역시 일제강점기 시기이다. 지적도를 처음에 작성할 때에 이미 집을 짓고 담장을 쌓아서 자신의 토지를 확보하고 있는 기존의 마을은 토지의 형태가 불규칙적이고 구불 구불한 담장의 형태를 따라서 작성되었다. 하지만 취락이 형성되지 않다가 후에 토지 매입 등으로 필지를 분할하게 되는 경우에는 당연히 반듯하고 정형화된 형태를 가지게 마련이다. 이는 택지개발을 하는 경우에 토지를 반듯하고 비슷한 크기로 나누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때문에 토지를 구획한 형태가 다르다면 그 지역에 거주지가 형성된 시기와 배경이 다르다고 판단할 수 있다.

15-알동네지적선
알동네 지적선

16-섯동네지적선
섯동네 지적선

알동네의 필지들을 살펴보면 부정형의 필지들이 불규칙하게 물려있는 것이 보인다. 중간 중간에는 제주 마을길의 전형적인 모습인 막다른 골목의 형태도 흔히 볼 수 있다. 반면 흥미롭게도 섯동네의 필지들은 나름대로 반듯하게 필지가 분할되어 있다. 필지의 형태를 보면 대개 길과 나란하게 구획되어 있다. 이는 비슷하게 필지를 자르려고 할 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간간이 골목길도 보이지만 막다른 골목은 그 길이가 짧고 대개 통과도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적정리를 할 당시에 이미 집들이 많았다면 이렇게 반듯한 형태로 구획정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곳은 초기 지적정리를 할 당시에는 거주지이기 보다는 농경지이거나 쓰이지 않는 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서동에 집 많이 짓고 산 것도 오래 안 된 일 아닌가요?] 예. 이 동네도 집이 몇채 어서나수다. 집터도 이것도 밧 이라나수다게. [그러면 삼촌이 열다섯 정도 되었을 때. 이 마을 네 개 동네 중에 어디가 제일 컸었나요?] 동네별로 하면 알동네가 좀 컷지. (여: 여, 무사 웃동네가 컷주) 웃동네가? (여: 알동네 그 호근여동네가 뭐 커나수가게) [섯동네는 웃동네나 알동네보다 적었나봅니다.] 아무래도 한라산 보인덴 해서 알동네가 섯동네로 빠져나오멍 초초로 집을 짓엉 나온겁주게

<강기택, 남, 1940년생, 신산리 섯동네> 2014.04.30

도로망과 필지의 형태는 어느 한순간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 또한 필지를 나누었던 방식은 당시의 토지관리체계를 가늠하게 하기도 한다. 글로 씌어지진 않았지만 지도는 그래서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의 지적도와 정의군지에 표시된 한질(下大路)의 연결망을 토대로 마을의 형성과 확장에 대해서 종합하여 보자. 현재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들은 신산이라는 마을이 애초에는 해안을 따라 횡방향으로 형성되었던 마을이 아니라 웃동네와 알동네로 구분되어 해안과는 종방향으로 형성되었던 마을이었다는 것이다. 제주의 해안마을을 보면 해안선을 따라 횡방향으로 형성된 마을을 종 종 볼 수 있다. 역시 신산리도 해안선을 따라 횡방향으로 형성된 마을로 보인다. 하지만 신산리의 기본적인 형태는 해안에서 중산간 방향인 종방향으로 형성된 마을에서 출발 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고지도에 나와 있는 것처럼 난산으로 이어지는 한질의 방향으로 신작로가 개통이 되었다면 당연히 신산은 난산리가 있는 방향으로 마을이 성장하였을 것이다. 강점기시절 개통된 신작로는 마을의 성장 방향을 자연스럽게 바꿔버린 것이다. 그것이 길의 힘이다. 길이 먼저일까 집이 먼저일까. 신산리 서동에서는 길이 먼저였다.


아키제주 건축사사무소, Archijeju Architects, Jeju Korea

Archi Jeju
옛말에 '배는 짓고, 집은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집을 짓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희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건축설계와 관련한 정보를 최대한 제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집을 만드는데 저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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