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서 미를 말함.

건축에서 미를 말함.

1.  美를 말할 수 있을까?

건축에서 미를 말함. 건축사는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 그 기본적인 구상도를 작성하는 사람이다. 또한 건축사는 전문지식을 가지고 활동하는 전문직업군으로 분류되는 부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도시를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의 건축문화가 바른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인지 우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는 정말 다양한 개성의 건물들로 가득 메워져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아무리 신이 인간을 만들면서 절대로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을 만들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지금 도시에 널려있는 건물만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도대체 이런 모습을 갖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모든 현대건축물이라는 것이 소위 전문교육을 받은 건축사에 의해서 디자인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무언가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갑갑증에 휩싸이게 되는 것을 무슨 이유일까?
제주지역은 대개의 건축물은 「건축계획심의」과정을 통해 디자인 규제를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드러난 현상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디자인 규제를 해도 건축물의 외관은 공감할만한 미적 발전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주라는 지역적 한계인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부족에 기인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최근에 파주출판단지를 방문하였을 때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것도 그러한 것이었다. 그래도 파주출판단지내의 건축물들은 국내에서 이름 있는 작가들이 디자인을 하였고, 대개의 건물들은 강한 개성과 수준 높은 디자인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별로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작가들의 집합체 속에서도 공통적인 언어를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그렇다면 미적 취향이라는 것은 공유할 수 없는 극히 개인적인 것인가?
수준 높은 작가건축에서도 미적 판단이라는 것이 극히 개인적인 것일 것이라는 추측은 디자인을 규제하고자하는 심의위원의 입장과는 매우 대치되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美에 대한 서로 다른 판단은 늘 선의의 공방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래, 넌 그렇게 디자인해라, 나는 이렇게 디자인 할 께.’라는 식의 개인적 작업으로 흐르게 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순수예술 분야에서는 그리 문제되는 생각이 아니다. 모든 예술작품에서는 개인적 작가의 의지와 생각 그리고 철학이라는 것은 그 작품을 생성하는 원천이 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축은 개인적 작업으로 판단하고 방치하기에는 그 결과물이 너무 거대해서 모든 사람들의 생활환경에 영향을 주고, 작품감상을 강요하고, 심지어는 삶의 패턴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개인적 작업으로 치부하고 말기에는 다소 성격상 다르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에게 자문을 해 보자. 나는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美라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보았는가? 우리가 흔히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처럼 생겼다거나, 무엇을 닮았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기준이 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보기는 하였는가? 그래서 한번 이 질문에 대한 변명부터 찾아가면서 ‘아름다움’의 정체를 따져 물어봐야할 것이다.
통상적으로 美를 추구하는 분야를 藝術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미술이나 조각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분야가 추구하는 바는 사람의 감성을 울리는 그 무엇인가에 있으며, 그것을 우리는 美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미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주장일 것이다. 만약에 예술이 이성적 활동의 결과라고 한다면, 우리는 열정적으로 삶을 살다간 많은 예술가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 한 일이다. 또한 지금은 세계가 하나의 생활공간처럼 교류되는 시대이지만, 그렇지 않고 지역간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과거의 시대에도 어느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건 예술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들을 하여왔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예술이라는 것이 과거에도 같은 의미로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그 점에 있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표음문자와 상형문자의 차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데리다는 서구의 문자는 음성중심주의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표음문자인 서구의 문자는 사물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지 않으며, 단지 음성의 대리인에 불과한 것이다. 때문에 서구의 문자는 사물을 직접 묘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중국이나 이집트의 문자와 같은 상형문자의 경우는 표음문자에 비해서 사물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인이 ‘말’를 가르키기 위해서 「horse」라는 말을 가르키는 자신들의 목소리와 닮은 글자를 사용하였다면, 중국이나 이집트처럼 상형문자를 사용하였던 나라에서는 말과 닮은 모양의 글자를 창안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소리를 직접 옮겨 적을 수 없었던 중국에서는 그림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전달’의 한 수단으로 발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서구에서의 그림이라는 것은 ‘의미전달’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다른 차원에서 그려졌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에 대한 초기의 다른 출발점은 이러한 문자와의 관계와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그림을 비교해 보면, 서구에서의 미술이 고대에서부터 매우 형식미에 치우쳐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을 감상하더라도, 사실적 묘사가 매우 강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인 인간을 묘사할 때 뿐 만이 아니라, 추상적인 신화속의 인물을 묘사할 때도 한결 같이 보이는 태도이다. 이러한 사실적 묘사가 극에 달하는 것은 르네상스에 이르러서 투시도의 발명과 인체해부를 통해 근육을 정확히 묘사하려던 다빈치의 그림을 통해 극에 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동양권에 있는 고전미술에서 볼 수 있는 매우 과장된 묘사라든가 해학적인 묘사와는 다른 접근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얼핏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대미술의 추상화라는 것은 동양미술의 경우에는 오히려 친숙한 개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동양의 미술은 원초적으로 사실적 묘사보다는 추상화하는 과정에 더 집착을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시각적 형식미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는 동양미술의 태도는 그림과 문자가 구별되지 않았던 전통적인 문자의 형식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단적인 예를 보자면, 서구의 미술도구에 흔히 사용되어진 이젤이라는 보조기구라는 것이 동양화를 그릴 때는 사용되지 않는다. 이젤이라는 도구를 만들기 어려워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동양화를 그림에 있어서 이젤과 유사한 도구가 사용되지 않은 것은 그러한 도구가 있어야할 이유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동양화에서 별로 필요치 않았던 이젤이란 도구의 역할이 무엇일까? 이젤이란 사물을 현장에서 사실적으로 옮겨 그리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다. 그러고 보면 동양화는 대개 종이를 바닥에 놓고 그리지만, 서양화는 대개 종이를 세워놓고 그리게 된다. 종이를 바닥에 놓고 그리는 것과 세워서 그리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얼핏 동양화에서는 물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종이를 세워서 그리면 물이 흘러내려서 그림을 그릴 수 없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결코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림을 그려본 사람은 쉬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종이를 바닥에 놓고 사물을 그리다 보면, 사물을 옮겨 그리는 동안 상당한 왜곡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시선이 사물과 종이를 번갈아 보는 동안 종이의 가까운 면과 멀리 있는 면의 차이로 인해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이젤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려본 사람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동양화에서 사물의 직접적인 묘사에 집중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즉, 매일같이 난초를 그리는 그 화가의 집에는 실재로는 난초가 없거나, 그가 그리는 난초와는 형태상으로 전혀 닮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금강산의 풍경을 그린 사람이 대개는 금강산을 직접 보면서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카메라 등의 발달로 인해서 실경을 사진으로 찍어서 그림으로 옮겨 그리기도 하겠지만, 과거에는 실제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서 그 앞에 화선지를 펴놓고 보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정말 이해하기 힘든 그림의 종목이 있다. 동양화에는 「사군자」나 「달마도」, 「신선도」와 같이 지속적으로 그려지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세상을 둘러보면 정물화로 그림직한 사물이 얼마나 많은데, 조선조 500년 동안 선비들은 매, 난, 국, 죽이라는 네 가지의 대상만을 즐겨 그렸다는 것이다. 달마도를 그린 사람이 달마를 보지를 못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매화와 난초를 그렸다고 해서 그 화가가 매화와 난초를 직접 관찰하고 그렸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일인가. 그런 면에서 볼 때 동양화의 세계는 역사적 발전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정지된 예술세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구의 미술의 역사를 보면 종교화라는 한정된 주제를 오래 동안 다루어 왔다고 하여도, 그 대상이나 표현 방법 등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고전적인 미술의 태도, 쉽게 말해서 그림을 그리는 태도의 원초적인 방식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전반적인 흐름에 있어서 우리를 포함하는 동양권의 태도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권의 태도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그림을 그린다는 욕구 자체가 다른 배경과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해 보는 동기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예술적 개념에 근거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같이 예술적 욕구를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또 설사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술적 욕구를 갖는다고 하여도, 그 예술적 욕구라는 것이 같은 혹은 비슷한 개념의 욕구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따져 물어보아야 할 것은 만약에 미술이라는 것의 출발점이 서로 매우 다른 이해와 목적을 가지고 접근 되어진 것이라면, 그 두 종류의 미술가가 같은 분야를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미적 욕구라는 것이 동 서양에서 추구되어진 바가 사실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미(美)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자체가 같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2. 말로써 대화가 가능한가?

점점 더 단순한 질문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가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단어를 사용하여야 한다. 도대체 이 단어의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습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분명히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하면서 의미를 주고받기는 하지만, 이 시스템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언어라는 것이 우리가 태어나서 가장 쉽게 배우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가장 배우기 어려워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모국어 즉, 우리말을 익히기 위해서 강사를 통해 배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부모가 일자무식이건 대학 교수이건 상관없이 아이들은 특별한 교육이 없어도 우리말을 어렵지 않게 배운다. 반면에 외국어 하나 익히는데 독학으로 성공한 사람은 결코 흔치 않을 것이다. 몇 년을 학원을 다니기도 하고, 개인교습을 받기도 하여도, 결국 실패하고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우리말을 너무도 쉽게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한 일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말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는 우리말의 단어의 의미를 얼마나 정확히 알고 사용하고 있을까? 더욱 나아가서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습득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필자도 처음 아기가 태어나고 기어다니기 시작할 때, 정말 어떻게 해야 단 하나의 단어도 모르는 이 아이에게 말을 가르쳐 줄 수 있을지 엄청나게 고민되었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말을 가지고 전혀 말을 모르는 아이에게 단어의 뜻을 전달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의 걱정은 우문일 뿐 아이는 별다른 가르침이 없어도 술술 말을 잘도 익혀나갔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부모가 가르쳐 준 말이라고는 정말 ‘아빠’와 ‘엄마’밖에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언어에 대한 의문점은 그치지 않는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친구가 사용하는 언어가 과연 같은 언어일까 하는 문제이다. 분명 우리의 말소리는 유사하지만, 정확하게 같은 소리일수는 없다. 그것은 사람마다 구강의 구조 등의 신체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변론 하더라도, 그러면 그 의미는 같은 것일까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맨 처음 배우는 ‘아빠’라는 말의 의미가 옆집 아이가 배우는 ‘아빠’라는 말과 의미가 같을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제각기 그 아이가 배운 ‘아빠’라는 말 속에는 그 아이가 경험한 아빠의 이미지를 토대로 형성되어져 있을 것이다. 즉, 엄한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가 배운 ‘아빠’라는 단어의 의미와, 자유로운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아빠’라는 단어의 의미가 같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제주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사용하는 ‘아버지’라는 말의 의미와, 서울에서 자란 아이들이 사용하는 ‘아버지’라는 말의 의미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 확대해서 보자면, ‘father’라는 단어의 의미와 ‘아버지’라는 단어의 의미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대상으로는 자신을 낳고 길러준 같은 격의 사람을 가리키고 있겠지만, 의미적으로 볼 때, 서구의 아이들의 생각하는 ‘father’ 처럼 우리의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에 ‘father’와 아버지가 같은 의미라면 이 두 문화권은 모든 면에서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단어의 의미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가장 원초적인 것은 역시 경험일 것이다. 우리는 경험하지 않고서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예를 들어서 누구나 한두 번 먹어본 떡볶기 사진을 보자. 아마 직접 먹어보지 않아도 사진만으로 이 떡볶기가 어떤 맛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맛의 떡볶기를 먹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의 ‘어묵요리’의 사진을 보자. 그것은 직접 그 요리를 먹어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맛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유사한 음식인 ‘어묵국물’요리를 먹어본 기억을 토대로 대강 그 맛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직접 경험을 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경험을 토대로 유추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바퀴벌레튀김’요리를 보고 그 맛을 짐작할 수 있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그것이 태국에서는 맛있고 흔한 간식거리라고 하더라도, 직접 먹어본 경험이 없이는 아무리 대신 먹고 말을 전해주더라도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언어라는 것은 맛을 직접 전달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바퀴벌레가 갖고 있는 평소의 감정을 토대로 맛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직접 먹어본다면 그 맛에 감탄하게 될 지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이렇듯 경험한 적이 없는 상황을 토대로 어떤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맛을 이해함에 대하여 또 하나의 곤란함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느낀 맛을 직접 경험을 배재하고 그것을 ‘전달’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아마 아이스크림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 ‘너도 한번 먹어봐라.’라고 말하지 않고, 의미전달을 하고자 한다면 대단히 곤란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얼핏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감각적 경험세계가 매우 개인적인 범위에 한정되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나의 감각적 경험세계는 내 개인적 경험세계이지 결코 공유될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같은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이 사용하는 용어는 그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것이며, 결국 하나의 단어는 그 단어를 사용하는 개인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개개인이 제각기 다른 경험을 토대로 다른 의미로 단어를 습득한 것이라면, 그 단어를 토대로 문장을 만들고 대화를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만약 내가 무엇을 먹어보고 나서 그 맛이 ‘국물 맛이 정말 시원하네.’라고 말했을 때, 그 맛이 어떤 맛인지를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거나, 혹은 오해를 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화가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마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종종 느끼는 이해의 장벽이 왜 생기는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의 장벽은 언어의 차원이 높아서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를 사용할수록 더욱 심해진다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세 자루의 연필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말보다 ‘나는 예쁜 연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너무도 추상적 차원이 높아서 의사전달이 곤란한 문장인 것이다. 추상적 차원이 높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아름답다는 것 역시 매우 추상적인 용어이다. 이것을 어떻게 규정하고, 의사전달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거나, 이해하려는 것을 포기하여야 할 것인가? 혹은 포기하여도 될 것인가?

3. 아는 것이 가능한가?

지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우리가 ‘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전제는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사실이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사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우리는 ‘안다’라는 상태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실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실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의 전제는 또한 ‘내가 있음’이 전제된다. ‘내가 있음’이 전제되지 않고는 ‘내가 아닌 다른 세상이 있음.’이라는 것은 더욱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감각적으로는 ‘내가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의 나의 상태와 술을 마실 때의 나의 상태가 같은가. 수시로 다르게 느끼는 나의 존재를 어떻게 하나의 ‘나’를 규정하여 입증할 수 있는가. 나 자신의 존재를 내 스스로 입증하는 것, 그것은 매우 중요한 철학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 이외의 것의 증명은 내가 존재함을 증명하지 않고서는 입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 자신의 존재를 외부와의 관계를 배제하고 스스로 입증해야 하며, 그 이후에야 이 세상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수학에서 증명할 수 없는 몇 가지의 공리를 토대로 수없이 많은 복잡한 수학이론을 전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서구의 철학에서 「나의 실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였다.
「안다」라는 상태에 대해서 언어적으로 생각해보자. 영어에서는 ‘안다’라는 것을 ‘I see’라고 말을 한다. 직역하면 ‘나는 보았다.’라는 뜻이다. 즉, 서구에서는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어떤 사물을 혹은 어떤 사실을 직접 보았다는 것은, 그것이 진실임을 입증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서구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방식을 가장 원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당신의 집 마당에 사과나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당신은 그 나무를 사과나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요사이 인기리에 방송되는 ‘CSI’라는 미국 드라마를 보면, 진실을 파헤침에 있어서 그들이 얼마나 증거를 중시하고 진지하게 다루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가 갖는 한계도 분명하다. 예를 들어 이러한 논리로는 ‘내가 죽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직접 죽어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았다고 해도, 직접 죽어보지 않았으므로 내게 죽음이 있다는 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분명히 사람이란 경험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 한계를 넘어서면 ‘본다’라는 개념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지식의 범위가 발생하는데, 그런 것이 우리 삶의 아주 일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러하다는 사실이 인식에 있어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의 언어를 보면, ‘본다’는 것을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좀 약해 보인다. 오히려 우리는 ‘~처럼 보인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어떤 사물이 A처럼 생각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A가 아닐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학생으로 보인다.’라는 것은 눈으로 본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학생이라고 생각은 들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식의 방법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와 서구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하여왔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얼마든지 가능 할 것이다.

4. 아름다움의 근거.

아름답다는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잘 쓰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매우 철학적인 용어도 아니며, 학술적인 용어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상적 용어인 ‘아름다움’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조차도 이렇게 쉽지 않은 것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아름다움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그것을 축적시키고, 또 후학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인식 속에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특이한 현상임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미를 말하기가 어려운 것은 미라는 것 자체가 언어로 규정하고 말로써 표현하여 전달시키기 어려운 대상이라는 곤란함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그것은 단지 美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속성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체계가 갖고 있는 속성에 기인한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미는 감각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지적 활동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래서 미는 지식처럼 명료하게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데 별로 이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감각적인 것을 다룬다고 해서 명료하게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미를 주제로 논의를 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미를 명료하게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또한 미를 객관적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미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반드시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미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며, 그렇지 않은 극히 개인적인 미의 속성은 굳이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주장할 논리적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감각적 활동인 미를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또한 인간의 이성적 활동인 지식이라는 것도 주관적 활동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한다. 사실 객관이니 주관이니 하는 구분이 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식활동은 그렇게 구분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여겼던 많은 일들이 사실은 매우 주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주관적 판단이라고 여겼던 많은 일들이 사실은 누구나 쉽게 공감하는 객관적 판단일 수도 있다.
요새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동해의 명칭을 생각해 보자.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동해를 [Sea of Japan]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매우 분개를 한다. 하지만 만약 일본인의 입장에서 동쪽에 있는 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East sea]라는 명칭을 쓰자는 것이 납득할 수 있는 주장일리는 없을 것이다. 어떤 사물의 명칭을 사용한다는 것은 학술적인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 하나를 결정하는 데 결코 객관적인 입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동해를 [sea of japan]이라고 실린다면 아마 전국적인 난리가 날 것이다.
명칭이 사물 그 자체를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사물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다르게 만들게 된다. 때문에 학술에 사용되는 명칭도 객관적인 명칭을 사용하려고 한다고 하지만, 주관적인 입장을 벗어버리지는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배워온 역사라는 것도 정치적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된다는 주관적 태도를 버리지는 못한다. 역사 속에서 패배하고 사라진 종족의 역사는 진지하게 다루어질 수 없는 것이 남아있는 자에 의한 역사기록 방식인 것이다. 즉, 학문이라는 것도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여 형성될 수밖에 없는 많은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대개 그것은 가치판단의 문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미라는 것도 개인적인 감각적 판단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미를 논의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오로지 개인적인 주관적 속성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감성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미라는 것이 객관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적 판단이라는 것이 오로지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유되어지는 감각판단이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미를 객관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이 객관적인 판단을 근거로 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라는 것이 역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으려면 객관적 판단을 근거로 해야 할 것이다. 그 객관적 판단이라는 것은 개인적 판단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다수가 공유하는 판단이라는 것이다. 그 다수라는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더욱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판단이라는 것은 [옳다]와 [그르다]의 문제는 아니다. 학문에서도 영원히 옳은 진리를 주장하기 어렵듯이, 미의 판단에서는 [옳은]판단임을 주장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옳은 판단’을 기준으로 하기 보다는 ‘가치 있는 판단’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가치 있는 판단의 근거를 삼기 위해서 ‘객관적 논의 대상으로서의 미’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만이 오로지 ‘논의할 수 있는 미(美)’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판단이라는 것에는 ‘무엇을 위해서’ 혹은 ‘누구를 위해서’라는 판단목적이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무엇을 근거로’라고 하는 판단근거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객관적 논의 대상으로서의 미라는 것도 이러한 ‘판단근거’와 ‘판단목적’을 통해서 미의 가치를 획득 할 수 있는 것이다.

5. 건축에서 美를 말함.

근대의 건축가들은 자신의 건축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규범적 주장을 하여왔다. 예를 들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라든가 ‘장식은 죄악이다.’라는 등의 선언이 그런 것이다. 이러한 규범적 주장을 하게 되는 배경에는 아방가르드 시대 이후의 근대건축시기에서 역사적 건축양식을 부정하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건축형태가 건축에서의 미적 규범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건축양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건축론을 확립하려고 했던 그들의 포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초의 산업디자인 교육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육과정에서 ‘점, 선, 면…’ 이라는 디자인 요소와 ‘비례, 질서, 균형…’ 등의 디자인 원리들이 등장하는 것도, 과거의 건축을 흉내내지 않고 객관적 건축미를 논의해보고자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역사적 양식을 무시하고 새로운 디자인론을 확립하고자 했던 그들의 의지는 단순히 표피적 양식의 문제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건축미의 객관적 근거를 묻는 것이었다.  이러한 건축미의 근원적 질문이 근대건축이론이 현재까지도 많은 비판론자와 추종론자를 가지게 되고, 그들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건축론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 대한 비판 중에 매우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국제주의양식으로 거론되는 ‘디자인에서의 보편성’에 관한 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역사적 배경이나, 지역적 배경과 무관하게 미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보편적인 미라는 것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국제주의’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보편적 미의식의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만약 보편적 미의식이라는 것이 없다면, 역사적 지역적 기반이 없이 미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곤란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보편적 미의식이 있다고 말하기에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건축물을 만들어왔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때문에 근대건축가들이 추구하는 보편적 건축미라는 것은 실재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은 보편적이라는 것 자체가 실재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재한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속성을 말하는 것이며, 보편적이라는 것은 실재하기 보다는 이상적인 가상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보편성은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건축미를 논의의 대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건축미라는 것이 어느 정도 보편적 논의의 대상으로서의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다면, 미를 주제로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라는 그 범위가 개인적인 것이어서는 논의가 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인류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보편적일 수 없는 다양한 건축양식으로 인해 미를 규정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미적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범위를 전제하고, 그 미적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집단을 배경으로 논의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미적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집단이란, 동일한 문화를 향유하는 집단을 기준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의 미적 취향이 다른 것처럼 하나의 문화집단과 또 다른 문화집단의 ‘논의할 수 있는 미적 취향’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근대건축론에 있어서 이러한 미적 대상의 범위를 모든 인류가 동일한 미적취향을 가졌을 것이라는 전제를 하고 논의를 전개해 나간 점에 있어서 상당한 비판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건축미를 말하는데 곤란함을 벗어버릴 수가 없다. 여전히 우리는 삼각형은 아름답고 사각형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건축미를 말할 수 있는 보편성의 범위를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지역과 제주의 문화로 한정한다고 해도, 역시 우리는 어느 형태는 옳고 어느 형태는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되지는 않는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사물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사물과 인간이 가지는 관계를 통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아돌프 로스는 장식이 죄악이라고 하였지만, 죄악이라는 것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불합리한 결합을 야기하지 않는다면 죄악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사물의 형태가 옳고 그름을 말하기위해서는 그 사물의 수용자인 인간과의 관계가 적절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건축형태의 문제는 이제 한집단의 인간성 즉, 문화성을 통하여 판단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제 세모가 옳고 네모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면, 세모는 제주인의 감성과 잘 결합하는 것이며, 네모는 제주인의 감성과 잘 결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제주인의 감성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제주인이 제주인의 감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도 쉬운 일이어야 마땅할 지도 모른다. 삶이 요구하는 그것이 바로 제주인의 감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이드가 주장하듯이 우리는 우리자신의 의식의 아주 표면적인 일부만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내면에서 울려오는 감성적인 내용은 즉각적인 오감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벨리스크를 생각해보자. 오벨리스크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집트의 독특한 구조물이다. 마치 거대한 칼날을 세워놓은 것 같은 오벨리스크의 인상은 그 정신적 의미를 이해하든 못하든 매우 감동적인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오벨리스크가 세계열강의 침략을 받는 동안 이곳저곳으로 뽑혀져 나가는 수모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뽑아간 침략자들의 입장에서는 오벨리스크가 승전의 기념품정도로 이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명하고 대표적인 사례가 성 베드로 성당의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인들이 이 오벨리스크를 뽑아서 세우면서 얼마나 자신들의 힘을 자랑스러워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태양신의 상징인 오벨리스크는 승전의 상징이 된 것이다. 워싱턴에도 오벨리스크를 흉내 낸 거대한 탑이 있다. 이 모두가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새로운 의미를 강제로 덧씌운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형태적으로 우아하다고 해도, 본래의 의미를 왜곡해버린 구조물을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형태를 가르키는 말 중에 ‘꼴’이라는 말이 있다. 길게 말하면 ‘꼬락서니’라는 말인데, 이는 단순히 형태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가르키는 말이기도 하다. 동양의 문자가 만들어질 때, 그림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듯이 우리 동네에서는 외형과 내용은 따로 구분해서 논해지지 않아 보인다.
이제 아름다움을 논의할 때 중요한 것은 ‘비례, 질서, 균형,..’ 과 같은 형식적 판단이 아니라, 그 형태가 어떻게 우리의 정서와 결합을 이룰 것인가 하는 문화적 배경을 살펴야할 것이다. 진부해 보이는 이러한 주장이 실재로 진부해져 버린 이유는 실질적으로 우리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체계적인 연구가 수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전통건축의 양식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라든가 ‘제주건축의 공간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가.’라는 등의 삶과 분리된 미적 혹은 형식적 대상으로서의 물리적 구조를 들여다보는 접근이 아니라, ‘제주인의 경제적 상황과 건축물의 관계는 어떠한 가’라든가 ‘제주인의 삶의 방식은 건축공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 가’라는 식의 인문적 상황과 건축환경과의 관계를 짚어나가는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건축가는 건축이라는 사물을 디자인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디자인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건축에서 논의 되어야할 아름다움은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용적인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현상세계를 구성하고 살아간다. 기억을 지우고 자꾸만 새로운 것을 입력해야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적응하기 힘든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분명하게 보인다. 이러한 시기에 이르러서 지역적 정서와 세계화의 추세와의 화해와 협력, 과거로의 향수와 새로운 미래로의 도전과의 화해와 협력, 변화를 즐기는 신세대와 전통적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구세대간의 화해와 협력은 앞으로의 논의할 수 있는 미의 기준을 잡아가는데 있어서 더욱 중요한 배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Archi Jeju
옛말에 '배는 짓고, 집은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집을 짓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희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건축설계와 관련한 정보를 최대한 제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집을 만드는데 저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Related St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