滄海爲家

滄海爲家

  1. 섬에서의 시간과 공간

고대로마의 집합주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면서 섬이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인 insular는 단절되었다는 의미의 ‘insulate’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섬은 외부의 세계와 단절된 한정된 공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고립된 세계에서 살고 있었는가? 중종실록에 등장하는 제주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르다. 중종5년의 기사에 나오는 ‘以海採爲業, 船載妻子, 滄海爲家 (처자를 배에 태운채 해산물 채취를 업으로 하여 망망대해를 마치 집 인양 여기고 산다)’라는 문장은 제주인들이 결코 섬에 고립되어 생활하지 않았음을 상상하게 한다.

현대인들은 하루를 24등분하여 시간을 활용한다. 1년 365일과 하루 24시간은 객관화되고 계량화된 시간이다. 근대건축이 추구하던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삶이 지향하였던 것이 어쩌면 시간을 객관화하는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섬사람들의 시간은 조금 독특하다. 식수로 사용하는 용천수가 대부분 해안에 용출되는 제주인들은 짠물을 마시지 않기 위해서는 물이 들어오는 시간을 늘 체크하고 살아야 했다. 어제는 아침 7시면 물을 뜰수 있었던 물통이 오늘 아침 같은 시간에는 바닷물에 잠겨서 물을 뜰 수 없게 된다. 그들에게 시간은 객관화되고 고정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섬사람들에게 공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바다건너 벽랑국에서 어머니가 왔다고 믿었으며 해마다 영등할망이 찾아온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섬사람들에게 바다는 그들을 고립시키는 경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해안선을 삶의 경계라고 생각하고 그 선을 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은 중앙정부의 위정자들이었다. 섬사람들은 섬에 고립된 사람들이 아니라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교통로를 가지고 있었던 공간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지역주의를 이야기 하는 배경에는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시간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미 고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살지 않던 섬사람들에게 땅을 기준으로 하는 지역주의는 의미가 없는 논의일지도 모른다. 쿠로시오 해류에 면한 이들에게는 토지에 묶여있는 지역주의 담론이 어울리지 않다. 고정되지 않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떠한 건축을 지향하였을까? 장시간 해양생활을 할 수 있는 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집도 그만큼 견고하게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르코르뷔제는 근대건축의 기능적인 아름다움을 설명할 때 배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근원이 기능의 드러남에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배를 잘 만들었던 섬사람들이 만든 집은 그러한 기능적인 미학이 드러나게 되었을까?

  1. 섬의 살림집

섬의 살림집은 다른가? 제주의 살림집은 일단 규모가 작다. 조선시대에 번성했던 조천포구에서 제주목에 이르는 그 지역을 제외하면 거의 전도에 걸쳐서 볼 수 있는 살림집의 형태는 세 칸 집과 네 칸 집을 벗어나지 않는다. 소위 말해서 뚝딱 뚝딱하고 금방 만들 수 있는 정도의 규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살림의 규모가 커지면 두거리집이 되고 또는 세거리집이 되지만 이는 한꺼번에 짓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살림집의 유형이 정형화되고 단위 살림집의 규모가 크지 않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할까? 과거의 제주의 살림집은 기술자들이 지은 것이 아니라 동네사람들이 같이 노력부조를 하여 집을 지었다. 그중에 기술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나무를 다루는 목수였지만 이 역시도 기술을 이용하여 부조를 하였고, 주인은 그 노력한 댓가를 나중에 똑같이 노력부조로 갚으면 되는 것이었다. 땅에서 흙을 일구고, 물을 부어서 흙질을 하고, 새를 이어서 지붕을 만드는 일들이 전부 부조로 이루어졌다.

민초들이 살던 살림집의 규모가 특별히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비슷비슷한 이유는 이러한 건축방식이 큰 이유가 된다. 동네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자기 마을에 어울리는 적절한 평면과 크기와 배치가 이미 들어있었다. 공동체에서 집을 짓는 다는 것은 이웃에게 갚아야 할 빚을 진다는 의미이다. 아마 그런 사회환경에서 자기 집만 유별나게 더 크게 지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산업자본주의가 들어오기 전 제주만의 특별한 살림집은 그렇게 지어진 것이다.

쿠로시오해류에 면한 섬의 살림집들의 유사함은 어쩌면 환경적 유사함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오키나와의 근대기의 콘크리트 주택에서 보이는 겹처마의 모습은 제주의 근대시기의 시멘트벽돌조의 건축에서도 흔히 보이는 형식이다. 이는 큐슈의 민가에서도 흔히 보이는 겹처마의 구조에서 환경적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비를 동반하는 바람이 흔한 환경요인이 주거건축에 반영되는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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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적인 가옥의 형태는 제주 살림집의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개방적인 육지의 마루와는 달리 상방대문을 닫으면 빛도 안 들어오는 캄캄한 상방은 육지의 청(廳)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이렇게 실내를 폐쇄 시킬 수 있는 구조는 가고시마의 지란 무사마을에서도 확인된다. 아마도 일본 남부의 전통가옥에서는 이러한 덧문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 된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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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문화적 동질성으로 설명하기에는 기술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어쩌면 폐쇄적인 공간을 지향하였다는 유사점은 비슷한 자연환경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응책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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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관련성으로 여겨지는 시설이나 공간도 눈에 들어온다. 중국황하강 유역을 비롯해서 오키나와와 제주에서 보이는 똥돼지 변소는 환경적인 이유이기 보다는 문화적 관련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봉덕이라 불리는 제주의 돌화로와 이로리라고 불리는 일본의 화로 역시 문화적인 연관성에 의존하여 설명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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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자연환경이 이유라고 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아 보이지만, 문화적 연관성으로 설명하기에도 어려우면서 유사성이 보이는 독특한 공간구성이 있는데 이는 별동정지라고 불리는 분동형가옥의 공간구성이다. 제주도에서는 화북에서 성읍에 이르는 북동부지역에 다수가 분포되어있는 이러한 별동정지의 공간구성은 제주도 전체를 기준으로 보면 일반적이지는 않다. 또한 오키나와를 비롯하여 일본 남부지역에 분포되어있는 오모테(본채)와 나카에(살림채)가 분리되어있는 이동조의 주거형식도 또한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서로의 지역에서 이형적인 유형인데, 이러한 유형이 각기 다른 섬에서 보여 진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문화적 연관성을 이야기하기에는 제주의 별동형 정지는 그 원인이 본채에서 정지의 기능이 필요에 의해서 떨어져 나간 것처럼 여겨지며, 일본 남부지역에서는 분동형 주거형식이 점차 필요에 의해서 결합되는 쪽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여서 분동형 주거의 상황이 서로 달라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두거리 살림집이 아닌 하나의 살림집의 기능이 두 개의 동으로 나뉘어진 분동형 주거형식이 서로 다른 섬에서 보여진다는 점만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쳐야 할 것 같다.

  1. 다시 건축으로

쿠로시오해류를 따라서 건축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 나가사끼 짬뽕이 떠오른다. 중국 사람이 일본에서 만들어서 유명해졌으나 정작 중국에는 없는 나가사끼 짬뽕은 중국음식일까 아니면 일본음식일까? 이 음식의 국적을 규정하기가 어려운 것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로 생각을 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가끔 지역적 특징이 보이지 않는 건축을 우리는 ‘국적 없는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비하를 하였다. 그러한 기준으로 나가사끼짬뽕은 매우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비난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그 음식의 국적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은 음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맛이지 국적이 아니다. 굳이 국적을 주장하지 않아도 그 음식을 통하여 사람들은 중국과 일본을 같이 이야기 할 것이다. 문화는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다.

건축에서도 일단은 좋은 건축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좋은 건축을 하기위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과거의 건축담론은 동네에서 같이 집을 지었으므로 동네의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혹시 이제까지 그것을 지역주의라고 생각하였다면 그것은 삶의 공간을 오해한 공간적 착각이다. 지역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말하는 것 역시 공간적 오해이며 그것을 국가단위로 키워서 이야기 한다고 해도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의 건축공동체는 건축담론을 누구랑 나눌 것인가가 중요하다. 국가라는 단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축담론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쿠로시오해류는 이러한 건축담론 네트워크를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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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 Jeju
옛말에 '배는 짓고, 집은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집을 짓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희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건축설계와 관련한 정보를 최대한 제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집을 만드는데 저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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